고향 방문

산청시대 2022-05-27 (금) 09:40 1년전 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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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읍 전경

1. 오랜만에 모임에 나가 친구들에게, “요즘 세상이 어수선한데 고향 방문은 어떠냐”고 물었다. 한 친구가 말한다. “고향에 계신 형님이 작은방 문이 고장이 나서 안 열린다며 고쳐야 할 텐데 수리비가 없다고 하시더라.”라며 웃는다.

그 친구 말을 듣고 “야! 이 자슥아! 작은방 문이 고장 났으면 큰방 문은 온전할 것 같으냐? 둘 다 고쳐드려!”라고 말하려다가 고향 방문과 고향 집 방의 문, 고향과 형님이 사는 곳이 어떻게 다른지 헷갈려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다가 나는 말이 안 되는 소리를 질렀다. “야이! 자슥아! 꼭 방문이 열려야 형님을 만날 수 있어? 마당이나 살밖에서 만나도 되고, 홀깨 옆에서 이야기해도 되지 않아?”라고 하였다. 내 말에 그 친구도 말문을 닫고 잠시 생각에 젖더니,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참, 너거 형님은 어디 계셔? 그 형님 말이야.”라며 고향의 문에서 고향에 계신 형님 쪽으로 말머리를 돌린다.

‘고향 방문’ ‘고향 집 방의 문’ 헷갈려

나는 한참 동안 말을 못 하고 누구처럼 고개를 옆으로 흔드는 것이 아니라 아래위로 세로 도리질을 두어 번 하다가, “건강이 안 좋아 요양병---에 계---”라며 더듬자, 그 친구 가로채듯 “야! 이 노무 자슥아! 병원 문은 고장도 없는데 왜 자주 안 가?”라며 꾸짖는다. 나는 즉시 오늘은 졌다고 말하고 고개를 숙인 채 소주잔을 흔들었다. 친구는 말없이 술을 따른다.

2. 20여 년 전 미국 조지아주 애틀랜타 인근의 주립대학에서 수업 시간에 글짓기를 하였다. 주제는 가을 단풍이었다.
산청 촌놈은 지리산 단풍을 떠올리고, “지리산 가을 단풍은 세계 제일이다. 5,000년 전 어느 날 유명한 화가가 지리산에 올라 단풍을 그리고 있었다. 단풍의 색이 너무도 다양하여 물감이 모자랐다. 물감이 덜 묻은 붓을 흔들어 바위를 그렸는데 그 바위를 단풍 바위라 하고, 남은 물감을 뒤섞어 어둡게 된 색으로 칠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하얀 치맛자락이 날아가는 듯이 빗친 부분이 생겼는데, 그곳을 칠선계곡이라 부른다.”라고 그럴듯하게 꾸몄다.

모범 작문으로 박수받은 ‘지리산 단풍’

그 글은 모범 작문으로 뽑혀 많은 외국 사람들의 박수를 받았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야! 이 서양 촌놈들아, 지리산 단풍 정도로 뿅 가다니, 지리산 돌곰이 필봉을 휘둘러 세상을 그린 곳이 산청이라는 fact를 알게 되면, 너희들은 놀라 자빠져서 발은 황매산 철쭉꽃 덤불 속에 박히고, 머리는 합천 초계의 유성처럼 떨어질 될 것이다!”라고.

3. 누구든 고향을 생각한다. 고향은 오래된 곳이고, 형제가 살고 있다. 그 모습은 사진을 보듯 눈에 선하다.
초가집 마을과 장터, 농협창고와 면사무소 사이의 나무전, 그 앞의 약방, 약방 앞에 늘어선 시골 사람들이 맡겨놓은 보따리들, 장터로 들어가는 길목에 늘어선 고무신 때우는 사람들, 공회당과 제재소 사이의 도장 나무 울타리, 농협창고 옆의 보건소, 보건소 마당 구석의 궤짝에 담긴 정순덕의 왼쪽 다리, 도가 앞의 모과나무, 우리 이발소 옆의 석빙고, 시장 안의 협성상회와 교차로 부근의 미진상회, 신우 서점과 건너편 빵집, 그 아래의 춘산여관과 산청서점, 경찰서 앞에서 초등학교 쪽으로 돌기 전 고래 심줄 파는 할아버지의 약방, 산청초교 교문 앞 식당, 그 뒤에 있는 객사로 통하는 작은 통로, 객사 마당에 있는 4학년 미화반 초가집 교사, 비행기 추락으로 부서진 지붕, 대한금속 사무실과 그 건너편의 목골 은행나무로 가는 골목, 그 옆의 빵구나시, 빵구나시 앞 도로에 널린 하얀 카바이드 가루, 그 건너편에 길가에 처음 들어선 붕어빵 가게, 차황가는 버스, 전기회사 건너편 골목 안의 웅덩이, 방직회사가 들어서기 전 강변 씨름장으로 가는 비탈길, 체부 아재 집 앞의 플라타너스는 확대사진을 전자현미경으로 보듯 뚜렷하다. 그러나 고향의 모습이 아무리 많고 좋아도 친구가, 형제가 없으면 단지 그림일 뿐이다.

고향 모습도 친구·형제 없으면 그림 뿐

4. 고향 방문은 친구방문이고, 형제방문이다. 그 문이 살짝 기울어져 있어도 말이다. 며칠 전 고향에 가서 친구들과 만났는데 이야기는 매한가지, 옛 모습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러나 어릴 때 친구들과 나눈 이야기, 노랫소리, 박수 소리와 떠들던 소리는 물론 짤짤이 소리, 개때기 개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마치 역사 교과서 88페이지에서 본 파르테논 신전의 둥근 기둥은 생각나지만, 그 옆에 쓰인 글이 무엇을 말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오래된 소리를 담은 고물 유싱개는 돈이 안 되고, 그림은 낡아도 비싸게 팔리는가 보다.

친구·형제와 옛날 모습 이야기 그려보자

어쨌든, 가로 도리도리는 지금의, 수평선의 모습만 보여주지만, 타향 하늘에서 눈을 돌려 고향 땅을 살피는 세로 도리는 고향의 문을, 친구와 형제의 문을 열어준다. 방 안으로 들어가 친구를, 형제를 만나면 그곳에는 단풍도 철쭉도 있고, 지리산 목장의 곰도 있다. 그 돌곰이 쥐고 있는 붓에는 fact를 그리는 물감이 충분히 묻어 있어 경호강 수족관의 부다리 입술을 그리고도 남는다. 친구와 형제와 더불어 고향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옛날 모습을 이야기로 그려보자. 기울어진 고향 방문이 문풍지 소리를 내고, 고장 난 벽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오포 소리를 낼 때까지.       
                         
2022. 5. 11. 산청초등학교 51회 노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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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서울 산청군향우회 부회장인 필자는 산청읍 부리에서 태어났으며, 산청초등학교(51)와 산청중학교(21회), 진주고등학교(42회), 성균관대 법대를 나와 사법연수원(14기) 수료했으며, 법무법인 세광 대표변호사로 있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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