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왕봉] 지리산 삼신할매

산청시대 2023-01-11 (수) 23:31 1년전 474

 

 

지리산 삼신할매의 자식사랑은 정말 남달랐다.
자식들이 추울까 봐 삼우당(문익점)에게 부탁해
지리산 발치, 목화를 심게 하여 광목을 만들었고,
남명선생에게 제자를 길러 나라 기강을 바로잡고
의병을 일으켜 무명옷 입은 충무공이 지나거든
그를 도와 왜구를 물리치게 하셨다.
 
할머니의 기도

삼신할머니는 아기의 잉태와 출산, 양육을 주관하는 토속신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는 어릴 적에 할머니가 정수를 떠 놓고 중얼거리며 손을 비비는 모습을 자주 보아왔다. 끝난 뒤 물으면 할머니는 “네 동생 건강하게 태어나기를 ‘삼신할미’한테 기도했다.”고 하셨고, 이웃에 그런 일이 있을 때도 할머니는 삼신께 기도를 올렸다. 그 덕분인지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30여 호의 우리 동네 아이들이 줄을 서서, 그것도 학년별로 줄을 지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제주도에선 삼신할머니를 ‘삼승 할망’이라고 하고, 26년에 걸쳐 썼다는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에는 지리산 둘레 마을에서는 ‘삼신 할미’라고 부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웅녀의 기도

삼신할매에게 아기의 잉태를 기원하는 풍습은 먼 옛날에도 있었다. 고려 충렬왕 7년(1281년)에 일연(一然)이 편찬하였다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환인(桓因)의 아들 환웅(桓雄)이 홍익인간(弘益人間)의 뜻을 품고 태백산 신단수 아래로 내려와 ‘아사달’이란 나라를 세웠다.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와 곰 한 마리가 찾아와 사람이 되기를 간청하자 환웅은 쑥과 마늘만 먹고 100일 동안 햇빛을 보지 않으면 사람이 될 것이라 하였는데, 곰은 금기(禁忌)를 지켜 삼칠일(21일) 만에 여자(熊女)가 되었으나, 호랑이는 버티지 못하여 사람이 되지 못하였다. 여자가 된 웅녀는 자식을 갖게 해달라고 신단수 아래서 기도하였고, 기도 끝에 단군을 낳았다. 단군은 서기전(BC) 2333년에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세웠다.

지금으로부터 4356년 전에 웅녀의 기도를 듣고 단군을 잉태하게 해주신 삼신할매는 지금도 아기의 탄생과 건강을 돌보고 있다. 곰이 웅녀가 되기 위하여 견딘 삼칠일은 ‘삼치레’라는 풍습으로 남아, 아기가 태어나면 아직도 우리는 삼칠일 동안 금줄을 치고 질병과 악을 막는다.

지리산 삼신할매

나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속으로 삼신할머니를 “할매”라고 말꼬리를 꼬면서 불러보곤 한다. 그렇게 부르면 정답기도 하고 기도를 더 잘 들어줄 것 같아서다. 연말이 되자 오만 가지 일로 세상이 어지럽다. 나는 새해를 어떻게 맞아야 할지 몰라 새벽꿈에 지리산 둘레길 모퉁이에 쭈그리고 앉아 천왕봉을 바라보며 할매를 찾고 있었다.

지리산 삼신할매는 욕심쟁이다. 할매는 자기가 점지해준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몸을 긁어 땀과 눈물로 날라 지리산 발치 곳곳에 들판을 만들었다. 할매의 살점이 흘러가 쌓인 들판에서 농사를 지어 먹고 자란 우리들이 지리산을 ‘어머니 산’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어머니는 할머니의 며느리이지만, 할매든 엄마든 부르기만 하면 지리산 할매는 “요 있다, 이놈아, 오대 갔다 인자 왔노.”라고 야단치듯 하면서도 둘레길을 쓸다 말고 허리를 반쯤 펴고 반갑게 맞아주신다.
삼신할매의 지혜

주름에 덮여 잘 보이지 않지만, 지리산 삼신할매의 눈은 지혜의 창(窓)이다. 어느 날 천왕봉에 올라 땀을 식히던 할매가 아사달을 둘러보았더니 대동강, 한강, 금강, 섬진강이 모두 서해로 흘러들고 있었고, 지리산의 땀방울은 남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할매가 멀리 남쪽을 보았더니 바다 건너 한라산 너머 배곯은 왜구가 보였다. 그대로 두었다간 할매의 살을 실은 땀줄기가 삼천포로 빠져 왜구에게로 갈 판이었다. 할매는 잽싸게 일어나 빗자루를 오른손에 잡고 왼쪽으로 쓸었다. 그러자 할매의 살덩이는 남쪽 바닷가에 언덕을 만들었고, 남해로 향하던 땀줄기는 그 언덕에 부딪혀 동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경호강과 덕천강이 남쪽으로 흐르다가 남강을 만나 한반도에서 유일하게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게 된 까닭이다. 또 할매의 팔심이 얼마나 세었는지 남강은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낙동강을 만나 그 물줄기를 동쪽으로 돌렸다.

서에서 동으로 흐르는 지리산 삼신할매의 살을 실은 땀과 눈물은 굽이마다 들판을 만들었고, 그 논밭에서 나고 자란 아이들은 세계적인 기업을 여럿 일궜다. 지도를 펴보면 할매의 빗자루가 지나간 자리에 누가 나고 자랐는지 알 수 있다. 지리산 삼신할매가 오른손잡이가 아니었다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는 남강은 없었을 것이고, 100대 기업의 이름은 지금과 많이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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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록 변호사가 직접 그린 산천재


욕심쟁이 할매의 자식 사랑과 나라 걱정

지리산 삼신할매의 자식사랑은 정말 남달랐다. 자식들이 추울까 봐 삼우당(문익점)에게 부탁하여 지리산 발치에 목화를 심게 하여 광목을 만들었고, 남명선생에게 산천재를 짓고 제자를 길러 나라의 기강을 바로잡고, 의병을 일으켜 무명옷 입은 충무공이 지나거든 그를 도와 왜구를 물리치게 하셨다. 억척같은 할매는 곰이 먹다 남은 쑥과 마늘을 감추고 있다가 허준 선생에게 주어 동의보감을 쓰도록 하셨으며, 성철스님으로 하여금 자식들의 정신을 바르게 가르치도록 하셨다. 산청의 오늘은 삼신할매 덕이 아닐 수 없다.

욕심쟁이 할매는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둘레길을 쓸면서 북쪽을 힐끗 보더니 긴 한숨을 쉰다. 왜 한숨이냐고 묻자 “야 이놈아, 네가 남한테서 돈을 빌리면 이자를 붙여 주면서, 왜 나한테는 대가도 안 내고 꾸기만 하느냐? 이 촌놈아!”라며 야단을 치신다. 나는 뭘 빌렸는지 몰라 “할매, 내가 뭘 꾸었노?”하면서 능청을 떨었다. 그러자 할매는 “지금도 니가 나를 꾸고 안 있나. 이 노마!”라며 때릴 듯이 폼을 잡는다. 겁먹은 나는 무엇을 빌린 것 같기도 하여 할매에게 빚을 좀 깎아달라고 부탁할 요량으로 치맛자락을 붙잡았다. 그 순간 나는 둘레길 바닥에 엎어지고 말았다. 할매의 치맛자락이 둘레길인 줄도 모르고 잡으려 하였던 것이다.

얼른 일어나 천왕봉을 바라보자 멀리 여의도 쪽에서 합창 소리가 들려왔다. “니것 내것 없다더니 니것 있고 내것 없고, 니탓 내탓 말자더니 지탓 않고 내탓 하네. 에헤야 디야 어기여차” 곡조는 분명 논밭에서 김을 매던 일꾼들이 부르는 노동요인데, ‘것’이 뭔지, ‘탓’이 뭔지 알기 어려웠다. 고민을 계속하자 가슴이 아리고 쓰려왔다. 아픈 가슴을 틀어쥐고 웅크리는데 이번에는 광화문 쪽에서 노래가 들려왔다. “아리아리랑 쓰리쓰리랑 아리아리 동동 쓰리쓰리 동동” 아! 이 아리랑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아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노래한 것일까?

지리산 삼신할매에게 드려야 하는 것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에 젖어 있다가 나는 “탁-” 하는 소리에 놀라 꿈을 깼다. 새해 첫 신문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였다. 신문을 펼치자 요즈음 우리 마음이 왜 이토록 아리고 쓰린지, 왜 지금의 세태가 저 노랫말과 같은지 답이 적혀 있었다. 신문을 읽고 나서 나는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삼신할매가 신문 위로 떠 올랐다. 아침 안개처럼 하얀 머리를 곱게 빗고 주름진 얼굴에 미소를 그득 담고서.

나는 얼른 두 손을 맞잡아 가슴에 대고 몸을 비비 틀면서, 이잔지 뭔지도 깎아주고 쓰린 마음도 낫게 해달라고 하면서 “할매애”하고 아양을 떨었다. 그러자 할매의 턱 아래 주름을 타고 작은 글자들이 조르륵 흘러내렸다.
‘니것 내것이 무엇인지는 겁외사에 물어보고, 아리쓰린 마음일랑 <동의보감> 2,023페이지에 적힌 대로 쑥 마늘을 달여 먹어라. 날씨가 추우니 무명옷을 겹쳐 입고 경의검 높이 들어 이 세상 바로 세워라.’

나는 그 글을 읽고 오랜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어깨를 자랑스럽게 흔들었다. 그러자 천왕봉에서 뻗어 내린 능선들이 꿈틀거리는 것이 보였다. 자세히 보았더니 지리산 사람들이 어깨동무하고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이마를 ‘탁’ 쳤다. 그렇다. “꿈은 미래를 빌리는 것이다. 삼신할매는 우리의 미래다. 대가는 눈물과 땀이다.”

그제야 지리산 삼신할매는 욕심이 반이나 풀렸는지 한숨을 거두고 치맛자락으로 새해 달력을 펼치더니 어깨동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어깨에 덮고 토닥토닥 두드리며 “내 새끼야, 새해에는 힘내라.”하고 속삭이고 있었다. 나는 신문을 들고 산천재 그림 앞에서 졸고 있다가 매실이 어깨에 떨어지는 바람에 눈을 떴다. 새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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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영록 / 법무법인(유한) 세광 대표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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