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적 시리즈(3) “민족적 분열 극복은 남명정신에서 찾아야”

산청시대 2018-04-12 (목) 17:34 6년전 1879  

​경의사상을 배우고자 찾아간 덕천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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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전경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졔 보니.
도화(桃花) 뜬 말근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겻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대매오 나난 옌가 하노라.

천왕봉 눈 녹은 물이 한 줄기는 대원사 계곡으로, 또 한 줄기는 중산리 계곡으로 흘러 내려오다 이곳 덕산에서 만나 화살처럼 빠른 시천(矢川)의 덕천강이 된다. 이제 막 매화가 꽃망울을 터뜨렸으니 물위에 뜬 도화가 보이지 않아도 남명 선생이 노래한 두류산 양단수는 여기인 듯하다.

남명선생은 58세에 지리산을 유람한 후 쓴 산행기 <유두유록> 말미에 ‘나름으로 평생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의 한 쪽 귀퉁이를 빌려 그곳에서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며 나오곤 하였으니, 이렇게 했던 일이 열 번이었다. 이제는 〈대롱대롱 매달린〉 조롱박처럼 시골집에서 하는 일없이 칩거하며 걸어 다니는 하나의 시체가 되어버렸다. 이번 걸음은 또한 다시 가기 어려운 걸음이 되었으니 어찌 가슴이 답답하지 않겠는가?’라고 애처로운 심사를 토로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화산은 두류산, 즉 지리산을 지칭한다. 그리고 선생께서는 그 간절함의 결실로 마침내 3년 후인 1561년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이곳에다 거처를 정하시게 되었다.

선생이 거처했던 산천재(山天齋) 주련에 적혀있는 덕산복거(德山卜居)를 읽어보면 말년에 이곳으로 들어온 선생의 심정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春山底處無芳草(춘산저처무방초) 봄 산 어느 곳엔 들 향기로운 풀 없겠는가마는
只愛天王近帝居(지애천왕근제거) 오직 천왕봉이 하늘에 가까움을 아끼노라
白手歸來何物食(백수귀래하물사) 빈손으로 들어왔으니 무얼 먹고 사나?
銀河十里喫有餘(은하십리끽유여) 은하수 같은 저 십리 물 마시고도 남겠네.

이렇게 평생 은둔 처사로 살다가 1572년(선조5년, 임신) 음력 2월 8일에 별세함에 따라 1575년에 선생의 후학, 최영경, 하항, 하응도, 손천우, 유종지 및 진주목사 구변, 경상감사 윤근수가 영남사림들과 함께 논의하여 산천재 서쪽 3리 지점의 덕천강가에 서원을 세우기로 결의하고, 하응도가 서원 부지를 희사하였다. 이듬해인 1576년 봄에 서원이 건립되고 가을에 위판을 봉안, 덕산서원으로 편액하고 석채례를 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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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앞 세심정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왜적에 의해 강당, 동재, 서재, 정자가 소실되고, 사우, 주사가 남았으나 그마저도 정유재란 때 모두 소실되었다. 1601년(선조34년)에 진주목사 윤열이 고을 여러 유림과 협의하여 중건계획을 수립하고, 1603년 가을 위판을 봉안하고 석채례를 지냈다. 이때는 남명선생 위패만 중앙에 독향 되었으나 얼마 후 오른편에 수우당 최영경도 배향이 된다.(수우당은 1612년 진주유림의 상소에 의하여 공식적으로 배향이 됨).

1609년(광해군1년)에 강당과 동재, 주고가 완성되면서 승정원에 추증하여 덕천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그 후 몇 차례의 중수를 거치면서 서원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으나, 1870년(고종7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덕천서원도 훼철되는 비운을 맞이하였다. 이후 1916년 진사 하재화, 주사 박재규가 진주향교에서 도내 유림들과 협의하여 경의당 건립계획을 세우고 경의당 중건 상량식을 거행하였으며, 하겸진이 상량문을 지었다. 1926년 사우가 준공되어 1927년 위판이 봉안되었다.

이때 중건에 경비를 부담한 하씨 문중에서 기존의 남명과 수우당 외에 하향, 오건, 정구, 김우옹을 추가로 배향할 것을 주장하고, 남명 후손들은 남명 도학의 전통을 오건과 정구가 계승하였다고 하여 최영경을 출향하고 이 두 사람만 추가 배향한다고 하여 끝내 합의를 보지 못하여, 1927년 3월 남명의 위패만 봉안하였다. 1974년 지방문화재 제89호로 지정되고 몇 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논란이 되었던 수우당의 위패도 최근에 봉안 되어 현재 덕천서원에는 남명과 수우당 두 분을 배향하고 있다.

예로부터 서원의 입지는 풍광이 수려한 배산 임수의 길지를 택했는데 덕천서원도 연화봉을 뒤로하고 앞으로는 덕천강이 흐르는 현재 행정구역상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 137번길 20-8에 소재한다.

서원의 공간구성을 이야기할 때는 통상적으로 일관된 명칭을 사용한다. 즉, 휴식을 취하는 유식공간, 강학을 하는 장수공간, 선현의 위패를 봉안한 제례공간이다. 덕천서원 또한 이러한 배치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현재의 위치로 보았을 때 덕천강변의 세심정이 유식공간에 해당하고, 외삼문인 시정문을 통과한 후 동서로 진덕제와 수업제, 가운데 경의당이 있으며, 경의당의 대청마루 양쪽에 동익인 광풍헌과 서익의 제월헌이 장수공간이며, 뒤편 숭덕사가 제례공간이다.

덕천서원의 공간구조에서 그 규모나 명칭은 몇 차례의 중건과정을 거치면서 변화가 많았다. 우선 1927년 중건하며 그 규모가 축소되고 강학공간의 연못도 없어졌다. 강학공간의 동제와 서제의 명칭이 초기의 경제와 서제에서 진덕제와 수업제, 외삼문 문루도 유정문에서 시정문으로 바뀌었다. 또한 유식공간의 정자도 몇 차례 규모와 명칭의 변화를 겪었다.

이번 답사의 주제 발표자인 덕산 변명섭 선생은 “덕천서원은 그 공간적 존재가치가 아니라 남명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하는 온상에 다름없다. 남명은 <자강(오건), 자정(정탁)에게 줌>이라는 서찰에서 ‘나라의 큰일은 국방을 튼튼히 하고 식량을 넉넉히 하는 데 불과하다’고 하면서 그 당위성은 백성의 삶이라는 것을 <민암부>에서 밝혔다. 그 정신이 실사구시의 실학정신으로 계승 발전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자본주의 정신의 난맥상과 분단 상황의 민족적 분열을 극복하는 열쇠를 덕천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조식선생의 남명정신에서 찾고자 한다면 지나친 논리의 비약일까”라고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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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하는 문화관광해설사들

민영인 기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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