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인의 역사기행] 산청 지명의 원류를 찾아 떠난 사오싱(소흥)(3)

산청시대 2018-05-11 (금) 11:10 5년전 2372  

<본지> 민영인 문화팀장이 지난 1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산청의 옛 지명이 있는 중국 항저우 사오싱(한문으로 소흥)을 탐방했습니다. <본지>는 10회에 걸쳐 민영인 팀장의 산청 지명의 원류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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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유상처 

 

‘소난정’(小蘭亭)이라고 하는, 청 강희제(康熙帝)가 이곳에 왔을 때 친필로 쓴 ‘난정’이란 글씨를 새긴 난정비정(蘭亭碑亭)이 나온다. 높이 1.73미터, 폭 1.02미터, 두께 0.27미터의 비석은 1695년에 건립되었으나 문화대혁명 당시 네 조각으로 깨어져 방치된 것을 1890년에 다시 붙여 복원했다. 여기서도 전 중국의 문화를 파괴한 문혁의 생채기를 생생히 볼 수 있어 안타깝다.

 

난정비정 앞쪽으로 그 유명한 곡수유상처(曲水流觴處)가 있다. 한겨울이라 그런지 몰라도 처음 본 순간 상상했던 것보다 작고 삭막해 보여 다소 실망했다. 1698년 청대에 처음 복원했으나 여러 차례 없어지고 복원되기를 반복하다 현재의 모습은 1980년 길이 78미터, 폭 0.8미터로 단장한 것이다. 

 

곡수유상(曲水流觴)은 자연에서 물을 끌어들여 인공적으로 에돌아 흐르게 만든 장소에서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시회를 말한다. 곡수에 둘러앉은 시객(詩客)들에게 위에서 잔을 채워 내려 보내면 술잔이 멈추는 곳에 앉은 사람은 술을 마신 다음 시를 짓고, 만약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셔야 했다. 

 

<난정서>(蘭亭序)는 “永和九年歲在癸丑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事也.”으로 시작한다. 영화9년(353년) 3월 3일 늦은 봄에 회계산 북쪽 산음의 난정에 모여 수계를 했다. 왕희지(王羲之)를 좌장으로 하여 친구인 손통(孫統), 손작(孫綽), 사안(謝安) 등과 자제들 노소 42인이 연회를 벌이고 각기 시를 지었으며, 왕희지가 서(序)를 짓고 썼는데 이것이 유명한 ‘천하제일행서’(天下第一行書)인 <난정서>다. 

당시 왕희지, 사안, 손작을 비롯한 11인은 2수씩, 15인은 1수씩 시를 지었고, 나머지 16인은 시를 짓지 못해 벌주 3잔씩 마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난정의 명성은 더욱 배가되어 서예의 성지이자 강남의 유명한 정원이 되어 지금도 매년 음력 3월3일에는 ‘서예절’ 행사가 열려 국내외의 문인들이 찾는다고 한다.

 

그러나 왕희지가 썼다는 <난정집서>의 원본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당태종 이세민이 왕희지의 글씨를 무척 좋아해 그의 작품은 다 수집하고 그 중 <난정집서>는 유독 아껴서 아들에게 천만년이라도 이 글과 함께 있고 싶다고 했다. 후에 고종이 된 아들이 아버지 사후 그의 무덤에 <난정집서>를 함께 묻었다고 한다. 심지어 그때 당태종이 수집한 모든 왕희지의 친필 작품도 모두 부장하여 현존하는 왕희지의 친필은 하나도 없다고 할 정도이다. 

 

곡수유상처 앞에는 유상정(流觴亭)이 있다. 술잔을 띄운다는 것이므로 곡수유상처의 풍류를 의미하는 정자이다. 그 옆으로는 왕희지의 당시 직책을 딴 왕우군사(王右軍祠) 사당이 있다. 역대 명필들의 문장이 벽에 모사되어 있으며, 그 중에는 낯익은 이름들이 많아 그 내용을 다 읽지 않아도 지루하지가 않다. 탁본을 뜨고 있는 아가씨의 모습도 보인다. 이렇게 뜬 탁본은 팔기도 하는데 가격은 물어보지 않았다.

 

다음으로 찾아간 곳은 어비정(御碑亭)으로 팔각형의 정자 안에 높이 6.86미터, 폭 2.64미터, 무게 약 18톤의 거대한 비석이 서있다. 비석의 전면에는 청 강희제가 이곳에 왔을 때 쓴 친필 ‘난정서’ 전문을 새겼고, 뒷면에는 그의 손자인 건륭(乾隆)황제가 역시 이곳에 들렀다 쓴 ‘난정즉사’(蘭亭卽事)를 새겼다. 비석의 위에는 구름 속에 노니는 용을 새겨 황제의 위엄을 더하고 있다.

 

중국인문기행을 쓴 송재소 선생의 번역에 의하면 “전부터 산음 땅 거울 속을 걷고 싶었는데, 맑은 유람 좋은 경치 한평생 유쾌한 일. 에부터 풍경이 좋다고 일컫는 곳, 곡수유상 그 이름 지금까지 장하도다. 짙은 대숲 봄 안개 유난히 고요하고, 계일보다 늦었지만 꽃은 활짝 피어있네. 물가에 왕희지의 용도법이 남았으니, 천년의 쟁송을 평가하기 쉽지 않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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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정 

 

어비정 앞에는 검은 바탕에 태(太)자를 새긴 비석과 18개의 물 항아리가 놓인 ‘임지18항’(臨池十八缸)으로 돌 탁자에는 붓이 있어 글씨 연습을 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여기에는 왕헌지의 글쓰기와 관련된 고사가 전한다.

 

왕헌지가 어렸을 때 글쓰기를 하다 아버지에게 “글씨를 잘 쓰는 비결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다. 아버지 왕희지는 아들의 질문에 마당에 있는 물 항아리를 가리키며 “저 18개 항아리 물로 먹을 갈아 글씨 연습을 하고 나면 저절로 알게 될 것이다.”라고 답했다.

아들은 그날부터 열심히 글을 쓰며 3동이의 물을 비우자 슬슬 꾀가 나기 시작하고 이만하면 잘 쓴다는 자만심도 생겼다. 자신이 보기에 잘 썼다고 여겨지는 몇 글자를 들고 아버지에게 찾아가 보여주었다. 왕희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중 대(大)자를 골라서는 거기다 점을 하나 찍어 태(太)자를 만들고는 “네 어머니에게 보여드려라”고만 했다. 

이 글을 본 어머니는 “우리 아들이 그동안 3동이의 물로 열심히 연습하더니 점 하나는 아버지만큼 썼구나.”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왕헌지는 크게 반성하고 글쓰기를 게을리 하지 않아 아버지 서성(書聖)에 버금가는 소서성(小書聖)이라는 세인들의 칭송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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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비정 앞 비석 

 

뒤편으로 나와 개울에 놓인 돌다리를 건너 조금 걸어 올라가면 1989년에 완공한 ‘난정서법박물관’이 있다. 그 웅장한 외관과는 달리 안에 전시된 내용물은 다소 빈약하다. 또한 남북조시대에 만든 난정고도(蘭亭古道) 일부(6.6미터)가 1989년에 발견되었다고 하며 원래 난정이 있었던 천장사(天章寺)로 가는 도로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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