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인의 역사기행] 산청 지명의 원류를 찾아 떠난 사오싱(소흥)(4)

산청시대 2018-06-16 (토) 10:13 5년전 2056  
<본지> 민영인 문화팀장이 지난 1월 24일부터 일주일간 산청의 옛 지명이 있는 중국 항저우 사오싱(한문으로 소흥)을 탐방했습니다. <본지>는 10회에 걸쳐 민영인 팀장의 산청 지명의 원류에 대한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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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음현 학당

시내에도 왕희지와 관련된 유적이 있으며 그 일대를 서성고리(??故里)라 부른다. 
소흥의 기차역이나 버스터미널(客?中心)에서 내려 옛 산음 땅으로 들어서며 처음 맞이하는 곳이다. 산이라고 부르기에는 민망할 정도의 해발 51미터 지산(?山) 위에는 야간 조명을 켠 탑이 솟아있어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오면서도 눈에 선명히 들어온다. 팔각 7층에 높이 36.8미터의 이 탑은 멀리서 보면 붓과 같아 문필탑(文?塔)이라 부르고, 산 아래에는 왕희지가 살았던 곳이 있어 왕가탑(王家塔)이라고도 한다. 지산의 즙(?)자는 삼백초, 어성초를 말하며, 이 풀이 많이 자라 즙산이라 붙였다. ‘월중잡식(越中雜識)’에는 월왕 구천이 오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을 때 오왕 부차의 대변을 입으로 맛보고 병세를 진단하여 그로 인해 입 냄새가 고약한 병에 걸렸는데, 돌아와 이 풀을 먹고 병을 고쳤다는 기록이 있다. 우리 산청의 동의보감촌 왼편에도 문필봉이 있다. 문필봉이 있는 곳은 예로부터 그 기운을 받아 선비가 많이 배출되었다고 하는데, 여기 소흥에서 문필탑을 보니 다시 한 번 그 의미가 새겨진다. 
산 중턱에는 ‘즙산서원’(?山?院)이 있다. 외벽에는 큼지막한 글씨로 ‘절학연원’(浙學?源)이라 씌어있고, 서원 입구 오른쪽에는 ‘성의’(誠意), 왼쪽에는 ‘신독’(?獨)이 적혀 있어 이곳이 학문의 전당임을 바로 알 수 있다. 1901년에는 ‘산음현 학당’으로 개칭되었다.

서원 내에 있는 초상은 유종주(劉宗周, 1578~1645)로 그는 왕양명의 양명학 계승자이며 ‘경세치용’(經世致用)을 강조한 명말 최후의 유학자 중 한 명으로 꼽히는 학자이다. 그는 여기서 강학하며 즙산학파를 형성했다. 지산서원 바로 아래에 있는 정자는 ‘장원정’(壯元亭)으로 산음, 회계 양현에서 장원급제한 사람들의 명단을 새겨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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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주사

지산 아래에 있는 계주사(戒珠寺)는 절로서가 아니라 왕희지가 살았던 곳이라 하여 찾는 장소이다. 입구에 들어서면 일반적인 절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좌우 방에 왕희지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절을 세울 때 출토되었다는 돌난간이 있다. 왕희지가 좋아하는 두 가지는 흰 거위와 구슬이었다. 
글을 쓸 때 힘찬 글체가 되도록 항상 구슬을 가지고 손에 힘을 길렀다는데, 하루는 흰 거위가 물 위에서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손에는 구슬을 굴리고 있었다. 그때 평소에 잘 알고 있던 스님이 찾아와 구슬을 내려놓고 담소를 나누는 중, 또 다른 사람이 찾아왔다는 전갈이 와서 스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시 손님을 맞이하러 갔다가 돌아와 보니 구슬이 보이지 않았다. 

왕희지는 당연히 스님을 의심하고, 스님은 본인이 가져가지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으나 왕희지는 믿어 주지를 않았다. 너무 속상하고 억울한 스님은 그날부터 밥을 먹을 수 없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앉은 채로 굶어죽었다.    
그런데 갑자기 거위도 먹지를 않고 물도 마시지 못하다가 죽었다. 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거위 배를 가르자 그 속에서 구슬이 나왔다. 왕희지는 자신의 잘못으로 친한 벗을 억울하게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심하게 자책하며 더 이상 구슬을 가지고 놀지 않으며, 집과 전답을 모두 바쳐 절을 짓도록 했다. 
기록에 의하면 왕희지가 벼슬을 내려놓고 은거에 들어간 359년에 이 집을 절로 개축하고 장안사라 했다. 그러다가 852년에 계주사라 고쳤으며, 현재의 건물은 1924년에 중건한 것을 1983년에 다시 중수했다.

계주사 바로 앞에는 묵지(墨池)가 있다. 서성(書聖)이란 칭호에 걸맞게 왕희지와 관련된 장소에는 항상 벼루와 붓을 씻었다는 묵지가 따라다닌다. 골목 담벼락 곳곳에는 왕희지의 글귀를 써놓아 서성고리 자체가 하나의 붓글씨 전시장 같은 느낌이다. 계주사를 정면으로 보고 똑바로 난 길이 지산지에(?山街)이며 묵지 바로 곁의 가게에 재미있는 글귀가 붙어 있다.
‘왕희지와 두오포빙(?婆?)의 전설’이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지산지에를 따라 조금만 더 내려가면 나오는 제선교(題扇橋)의 주인공인 그 할머니와 동일인이다.

제선교의 고사를 소개하면, 어느 무더운 여름날 왕희지는 친구 집에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지산지에 동쪽의 한 다리를 지나가며 그 다리 난간에 걸터앉아 부채를 팔고 있는 백발의 노파를 보게 되었다. 
왕희지는 마음속으로 생각하기를 저 노파는 점심때부터 반나절동안 여기서 부채를 팔았는데 아직도 저렇게 많이 남아 있지. 혹시 조잡하게 만들어서 안 팔리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노파 앞으로 다가갔다. 
왕희지는 노파에게 부채 5개만 잠시 빌려달라고 한 뒤 다리 곁에 있는 찻집으로 들어가 먹과 붓을 빌려 부채에다가 “??徐? 청풍서래” (시원한 바람이 서서히 불어오다) 네 글자를 큼지막한 행서로 쓰고 왼쪽 아래에 낙관과 이름까지 쓴 다음 노파에게 돌려주었다. 
할머니가 보기에는 깨끗한 부채에다 낙서를 한 것 같아 왕희지의 옷소매를 붙잡고는 소리쳤다. “내가 이 부채를 팔아서 생활하는데, 당신이 여기다 낙서를 하면 어떡해, 물어내” 왕희지는 노파를 바라보며 “화를 내지 마시고, 혹시 누가 부채를 사러 오거든 다른 말 하지 말고 ‘왕희지가 직접 쓴 글이다’라고만 하라”고 웃으며 말했다. 
과연 조금 지나자 사람들이 다리로 몰려들어 너도 나도 부채를 달라고 했다. 노파는 가격을 더 높게 부르며 왕희지에게 고마움을 느꼈다. 훗날 사람들은 왕희지의 선행을 기념하여 이 다리를 제선교(題扇橋)라 부르고, 그 옆에는 큰 돌에다가 ‘晋王右??扇?’(진왕우군제선처)라 새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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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선교 부채파는 할머니와 왕희지

왕희지가 글씨를 써 준 덕분에 부채 장사를 잘한 노파는 이후 수시로 왕희지에게 부채에 글을 써달라고 졸랐다. 노파가 너무 자주 찾아 와서 이제 왕희지는 노파를 피했다. 따리서 이웃 사람들은 모두 이 할머니를 ‘두오포포’(?婆婆 피하는 할머니)라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날씨가 서늘해져 부채를 사려는 사람이 없어졌다. 노파는 곰곰이 생각해보니 부채 팔려는 욕심에 그동안 왕희지를 너무 괴롭혔고, 이제 부채 팔 계절도 아니므로 고마운 마음이 들어 사례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부채를 만드는 손재주가 있는 노파는 빵 굽는 솜씨도 뛰어나, 왕희지에게 가져갈 빵이라 더욱 정성껏 여남은 개를 만든 다음 찾아갔다. 노파는 왕희지를 보자 그동안 괴롭혀서 죄송하고 도와줘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하며 가져온 빵을 내 놓았다. 
왕희지는 날씨가 추워지면 부채를 팔수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고 노파를 걱정하며 빵을 먹었다. 노파가 맛이 어떠냐고 묻자, 정말 맛있다고 대답하며 빵을 팔면 되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빵 이름은 사람들이 모두 노파를 두오포포라고 하니 ‘두오포빙’이라 하면 좋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노파가 그러겠다고 대답하니 왕희지는 또 직접 ‘타파병’을 적어 주고, 노파는 그 글씨를 간판으로 사용하자 빵은 날개 돋친 듯이 팔렸다. 

이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지금은 샤오싱의 특산물이 되었으며, 왕희지가 좋아한 빵이라 하여 이 빵을 즐겨 먹으면 왕희지처럼 글씨도 잘 쓰고 시도 잘 짓게 된다는 광고를 하고 있다. 나도 이 말에 홀려 5개들이 한 팩을 사서 먹었는데. 안에는 팥, 참깨, 계화 등을 각각 넣은 다양한 종류가 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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