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준제 주필의 역사탐방(2)

산청시대 2018-07-13 (금) 13:47 5년전 2189  

백두대간 주맥은 천왕봉에서 수양산을 거쳐 

사리로 내려와 산천재를 감싸고 덕산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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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남명선생 묘소와 오른쪽 수양산 정상

 

백두대간의 맥이 백두산에서 시작하여 금강산-설악산-태백산-소백산을 거쳐 지리산으로 이어지고, 천왕봉에 머물러 그 주맥을 형성한다는 사실에는 크게 이론(異論)이 없다. 여기서 천왕봉에서 흐른 주맥이 어디로 흐르고 있는지를 2회에 걸쳐 추적한다.

성준제 <산청시대> 주필

 

산천(山天)은 <주역> 대축괘(大畜卦)로 

‘산이 하늘위로 솟은 상이니, 

그 쌓음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남명 선생은

‘산속에서 창조적 학문의 힘을 키운다’는

큰 뜻을 품고 후학양성에 힘 써왔다.

  

■지리산 주맥의 끝머리가 바로 덕산 사리(絲里)다.

두류산(頭流山)이라는 글자는 지리산을 지칭한다. 백두산(白頭山) 정기가 흘러 온 산(山)이기에 예로부터 지리산은 두류산이라 불렀고, 양단수(兩端水)라는 석비에 새겨진 글자는 양쪽에서 흘러들어 오는 물줄기, 두물머리를 뜻한다. 풍수에서는 두 물줄기 머리에는 산줄기 따라 흘러온 땅기운이 멈추기에 명당 혈은 두물머리에 있다고 한다.

 

남명은 경남 합천군 삼가면 토동에서 탄생했다. 토동 마을 부근에서 보면 지리산 천왕봉이 선명히 보인다. 자굴산에서도 우뚝 솟은 천왕봉은 자태를 더욱 드러낸다. 천왕봉을 토동에서 보나, 자굴산에서 보나, 그리고 이곳 산천재에서 보나 시선각도가 비슷하기에 똑같은 모양으로 보이며, 특히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은 단연 빼어났다. 천왕봉 지령을 담고 있는 그릇이 산천재(山天齋)라는 것은 풍수분석으로 상세히 드러난다.  

 

대동여지지도의 산줄기(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이르는 산줄기)를 풍수형국론 시야로서 잡아보면 전형적인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형국도 임을 알 수 있다. 조상산을 떠난 용(산줄기)이 다시 머리를 돌려 조상을 쳐다본다는 회룡고조형이 산천재의 풍수형국이다. 어린 손자(산천재)가 할아버지 (천왕봉)을 쳐다보니 천왕봉이 산천재에  산기운을 듬뿍 준다는 것이 회룡고조에 걸린 풍수발복 관계이기도 하다. 

(인용; <서울풍수>/장영훈/도서출판 담디)

 

■산천재(山天齋)는 지리산 주맥이 감싸고 있다.

천왕봉에서 산천재까지 연결된 산줄기는 대동여지도를 보아도 한눈에 드러난다. 천왕봉에서 산줄기는 동쪽으로 뻗어가다가 남쪽을 향해 C자 모양으로 몸을 틀어서 어느 곳에 이르는데 그곳은 바로 산천재가 입지한 곳이다. 그러므로 천왕봉은 산천재의 조산(祖山)이 되고 주산(主山)은 산천재를 발치에 두고 있는 배산(그곳에는 남명묘소가 있다)이 된다.

(인용; <영남학파 서원의 풍수지리에 관한 연구>/2011/반오석 철학박사 논문)

 

수양산(首陽山, 502m)은 시천면 사리와 단성면 백운을 경계로 하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8코스에서 백운계곡을 지나 마근담 방향으로 숲길을 따라 오르다 보면 만날 수 있다. 정상에 서면 천황봉이 한눈에 보인다. 수양산에서 시천면 사리로 하산하면 산행의 진수를 느낄수 있다. 수양산에서 사리까지는 2km 정도이다. 이곳 수양산은 백두대간이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인용; <시천 면지> 8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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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대명당도

                

■사리(絲里)는 천왕봉의 날머리다

사리는 누에가 실을 토하는 형국(蠶頭穴)이라 하여 예전부터 실골. 사륜동(絲綸洞)이라 불렸다. 수양산에서 내려온 시무산의 끝이며, 마근담에서 발원한 맑은 물이 사리를 지나 덕천강에 합류한다. 1561년 남명 조식 선생이 산천재를 지어 많은 후학을 양성하셨고, 이곳에  묻히셨다.

이곳에 선영을 택지할 수 있었던 것은 누에머리형(잠두형 蠶頭形)이 뚜렷했기 때문이다. 누에는 머리를 자주 흔든다. 머리를 흔들 때 움직이는 땅기운을 받기 위해서 산봉우리(누에머리) 정상 바로 아랫녘이 택지점 조건이 잠두혈에는 붙는다. 남명묘소 역시 정확히 그 지점에 택지 되어 있다. 

이곳의 지형이 누에가 실을 토하는 형국(잠두혈 蠶頭穴)이라 함은 천왕봉의 주맥이 수양산을 거쳐  그 맥을 토하여 덕산을 감싸고 있다. 남명묘소 역시 정확히 그 지점에 택지 되어 있다. 

앞으로 불쑥 밀고 들어오는 산줄기는 비단자락이다. (남명의 글을 읽어보면 만년에 퇴계와 자신을 비교한 기록에 자신의 학문을 비단에 비유하고 있다.)

옥녀가 비단을 짠다는 옥녀직금형(玉女織錦形)임이 뚜렷하다. 잠두 혈과 옥녀직금형 사이에 있는 유일한 마을 이름이 사리마을, 누에(남명묘소)가 실(사리마을)을 뽑으니 옥녀가 비단을 짠다(옥녀직금형)는 풍수가 보인다. 

 

■남명이 ‘무릉도원’으로 선택한 덕산

남명은 덕산을 백두산의 정기가 흘러 멈추고 이곳에 머물러 쌓이는 곳으로 판단하고 바로 이곳을 무릉도원으로 선택했다. 

남명은 일찍이 <유두류록>(流頭流錄)을 쓰기까지 덕산동 3회, 청학동 3회, 용유동 3회, 백운동1회 등 총 11회에 걸쳐 지리산을 다녀보고 난후 덕산동(德山洞)을 선택했다. 그 첫째 이유는 웅장한 천왕봉을 항상 볼 수 있음이요, 그 둘째는 풍수 지리적으로 완벽한 장풍국의 입지를 이룬 덕산동을 무릉도원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덕산은 백두대간의 끝에 위치하는 지리산 천왕봉 아래에 있고 둥글고 크고 너르다. 천왕봉에서 좌우로 두 맥이 날개를 펼치고, 중앙으로 또 하나의 맥이 나와 구곡산을 만들고 명당을 만들었다. 천왕봉 항상 보이고 산계와 수계가 일치하며, 완벽한 장풍국을 이룬 입지로 터가 넓고 그 입구가 외부인들이 잘 찾아올 수 없는 무릉도원의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덕산을 무릉도원으로 택한 남명은 그 혈을 찾아 묘지로 정하고, 그 아래를 살터로 정하신 후 이름을 산천재(山天齋)라 하였다. 산천(山天)은 <주역> 대축괘(大畜卦)로 ‘산이 하늘위로 솟은 상이니 그 쌓음이 지극히 높다’는 뜻이다. 대축은 간괘(艮卦)와 건괘(乾卦)로 구성되는데 간괘가 산(山), 건괘가 천(天)을 나타내 산천(山天)이라 하였다. 또 주역에서 ‘산은 멈춘다’(止), ‘천(天)은 하늘의 힘, 창조적인 힘’이란 뜻도 품고 있다. 그래서 이 뜻을 합쳐 ‘산속에서 창조적인 학문의 힘을 키운다’라는 큰 뜻을 품고 후학양성에 힘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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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준제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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