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선비 중재(重齋) 김황(金榥)을 찾아“경(敬)으로써 근본 세우고 이치를 궁구해야”
동강 김우옹 12대손‥1896년 의령 궁유 출생 중재를 말할 때 보통 ‘마지막 유종’(儒宗, 유학에 정통한 사람들이 우러러보는 큰 학자)이라는 수식어를 잘 붙인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를 굳이 선비라고 부르고 싶다. 증자(曾子)는 ‘선비는 모름지기 마음이 넓고 뜻이 굳세어야 할 것이니, 그 임무는 무겁고 갈 길은 멀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선생에 대한 이야기는 경상대 한문학과 허권수 교수의 <중재 금황의 생애와 학문>, 진주교대 김낙진 교수의 <중재 금황의 심즉리설 옹호와 활동>이라는 논문에 잘 나와 있다.
제자 1천명 배출‥4,051편 산문 남겨 중재 선생은 동강(東岡) 김우옹(金宇?, 1540-1603)의 12대손으로 본관은 의성이며, 1896년(고종33) 5월 26일에 의령군 궁유면 운계리에서 출생했다. 나라가 망하자(1910년) 아버지 매서(梅西)공이 세상을 피하여 산청으로 이거(移居)하며 1978년 11월 15일 내당서사(內塘書舍)에서 향년 83세로 돌아가실 때까지 산청과 인연을 맺었다.
유월장에 전국 각지 유림 3천명 조문 1978년 선생이 돌아가신 해 유월장(踰月葬, 사망한 뒤 달을 넘겨서 장례를 지내는 것)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유림 3,000여명에 문인(門人)으로 복(服)을 입은 사람만 300여명에 이르며 접수된 만사(挽詞, 죽은 이를 슬퍼하여 지은 글)와 제문(祭文)이 700여 편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활동이나 학문에 대한 논의가 우리 산청지역에서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아마도 남명의 정신적 영향력이 큰 강우(江右)지역에서 강학하며 퇴계학맥과 연결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면우 곽종석 선생을 스승으로 삼아 선생은 면우(免宇) 곽종석(郭鍾錫)을 스승으로 삼았으며, 면우는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의 제자고, 한주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의 제자이니 결국 퇴계에 닿는다. 또 37세에는 아버지 매서공이 도산서원 원장이 되자 안동으로 따라가서 퇴계의 후손 및 문우들과 교류를 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학파에 구애받지 않고 노론계 학자들과도 교류하며 학문을 토론하였고, 남영의 사상과 학문에도 관심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유학은 과거만 고집하는 구학” 일갈 유림독립운동 관여‥두 번 옥고 치러 선생의 학문하는 방법은 경(敬)을 위주로 하여 근본을 세우고 이치를 궁구하여 그 앎을 확실히 했다. 이치를 궁구하는 일은 독서를 근본으로 하였는데 경서를 이백 번 이하로 읽은 적이 없다고 한다. 한주학파의 심즉리설(心卽理說)을 기반으로 도학을 정립하였다. 한주학파 심즉리설 기반 도학 정립 지난해 12월 5일 선생의 체취가 남아있는 신등면 평지리 내당의 도양서원을 찾아 제자인 문병국(73) 선생으로부터 중재 선생의 생생한 이야기를 전해들을 수 있었다. 문병국 선생은 당시 군대를 다녀와 선생의 수하에서 가르침을 받았으며 아마 당시 제자 중 가장 막내였을 것이라고 하며, 고향을 지키고 있다 보니 선생의 장례를 비롯해 현재까지 모든 연락과 안내를 도맡고 계신다고 했다. 선생 학덕 기리기 위한 도양서원 도양서원은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제자들이 건립하였으며, 안으로 들어서면 박문당(博文堂)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동재인 용경재(用敬齋)와 서재인 진학재(進學齋), 강당 뒤편에 사당인 종현사(宗賢祠)가 배치되어 있으며, 뒷담 너머 언덕에 묘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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