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 빨치산 이영회와 빨치산 잡는 강삼수

산청시대 2019-03-22 (금) 09:01 2년전 1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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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고개에 있는 88사건 위령비

국도3호선 새고개 ‘88사건 위령비’ 내막
자신마을 매복 이영회 부대가 경찰 습격
빨치산서 전향해 사찰유격대 된 강삼수

국도3호선 산청읍 새고개에는 그곳에는 4개의 충혼탑이 서있다.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베트남참전기념비, 6.25참전기념비, 88사건위령비, 호국무공수훈자전공비다. 그 중 88사건위령비는 잔비 및 패잔병 집단들이 1951년 8월8일 오전9시경 자신마을 아래 장승배기에 매복하고 경찰과 의용경찰을 유인 습격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것을 기록하고, 뒷면에는 그 때 희생당한 65명의 이름을 기록해 두고 있다.

산청지역 빨치산 핵심 인물은 이영회

8.8사건의 장본인이며 산청지역 빨치산 활동에 있어 핵심인물은 남부군도 이현상, 정순덕도 아닌 바로 이영회이다. 이영회는 전남 순천출신으로 1947년 5월 국군경비대에 입대하였다가 1948년 10월 19일 일어난 여순사건에 가담하여 지리산으로 들어와 빨치산이 되었다.
그리고 6.25전쟁이 발발하고 1950년 11월 10일 ‘조선인민유격대 남부군’(약칭 남부군)이 창설되었을 때 이영회는 남부군 편제에서 사라졌다. 지리산 빨치산들이 인민군의 남하에 따라 낙동강까지 진출했다가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으로 인민군이 후퇴 할 때 그는 본대에서 이탈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950년 9월 29일 함양군 휴천면 문정리에서 ‘경남도당 인민유격대’가 조직되고 이영회는 다시 이 경남도당에 나타나 주로 산청지역을 거점으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는 남부군 57사단으로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데 ‘유격전 귀신’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기동투쟁에 뛰어났다.

산청 8.8사건 이후 활동 영역 넓혀가

이영회 부대는 1951년 8월6일 400여명의 병력으로 단성면 방목리 석대마을로 내려와 단성지서를 공격했다. 그러나 우세한 병력과 화력임에도 이틀 동안이나 접전을 벌이며 산청경찰서 지원대를 유인할 작전이었다. “8일 새벽에 지원하겠다”는 통신을 도청하고 빨치산 350여명을 산청읍 자신부락에 매복시켰다. 오전 6시30분 새고개(깊은 골재)로 지원대를 태운 트럭이 오자 기습공격을 했으며, 산청경찰서 지원대는 대항도 하지 못하고 큰 피해를 입었다. 이것이 산청 8.8사건이다.
그 후 9월13일 생비량지서를 공격하고, 삼가지서, 가회지서, 대병지서를 공격하며 10월15일에는 무주군 설천면까지 기동투쟁을 벌여나갔다. 1952년 6월7일에는 웅석봉으로 이동하여, 7월 1일 금서면 덕촌마을로 내려와 7월6일 생초지서와 금서지서(당시에는 특리 도로변에 지서가 있었다.)를 피습하고 거창 가조로 넘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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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회가 활동한 지리산 계곡

빨치산 잡는 귀신 ‘강삼수’ 사찰유격대장

1953년 4월19일 경남도경에서는 산청경찰서에 이영회 부대 섬멸을 위한 작전명령 제9호를 하달하여 이영회 부대 섬멸을 시도했다. 산청경찰서는 경찰관 20명과 의용경찰 80명을 지리산 쑥밭재에 3박4일 동안 매목을 시키며 공격을 했으나 오히려 경찰관 20명이 희생당했다. 
빨치산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는 사찰유격대였다. 사찰유격대는 빨치산 전향자로 구성된 조직으로 길잡이 역할과 역유격전을 펼쳤다. 사찰유격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이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출신의 강삼수였다. 6.25전쟁 전에 친구들과 빨치산이 되었다가 자수한 그는 산청지역에서는 전설적인 인물이 되었다. 마지막 공비였던 정순덕은 “강삼수라는 이름만 들어도 빨치산들이 줄행랑을 칠 정도로 빨치산 잡는 귀신이었다”고 회고했다. 따라서 이영회는 강삼수를 잡으려고 금서면 지역을 자주 공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53년 11월 생비량·신등면 경계서 사살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되고, 군경합동부대에서 경찰을 독립시켜 빨치산 토벌작전에 전념하는 ‘서남지구 전투경찰사령부’를 설치하며 이영회부대도 전투력이 약회되기 시작했다. 1953년 8월 20일 이현상의 호위대장을 맡았던 이영회 부대 송관일 부대장이 삼장면 대포리에 보급투쟁을 나갔다가 사살되었다. 이현상도 9월 18일 하동 빗점 골에서 사살되었다.
이영회 부대는 11월 23일 의령경찰서를 습격하고 지리산으로 복귀하던 중 11월27일 새벽 2시경 진주 미천면과 산청 생비량면, 신등면 경계를 통과하다 경찰 매복조에 발각되어 맹렬하게 저항했으나 사살되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영회의 실제 나이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빨치산 산중 사랑, 그의 처는 자수

빨치산은 혁명전사로 살고죽기를 맹세하였기에 ‘사랑’은 혁명의 장애물이라고 비판했으나, 이현상, 김지회 등 지도부는 산중처가 있었고. 이영회에게도 이옥순이 있었다, 
그는 이런 비판에 “내 나이 스물에 입산해서 풍찬노숙 사람답게 살아온 적이 하루도 없소.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다 죽을 것이 뻔 하지 않소. 내게도 이 세상에 태어나 서로 사랑하는 여인 한 사람쯤 있어서 나쁠 것 있겠소”라고 했다 전한다.
이영회의 강력한 자수 권유에 그의 처 이옥순은 1952년 1월 백야사령부에 생포되었다가, 빨치산 자수를 권유하는 선무방송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후 부산서 살면서 조용히 역사 뒤로 숨었다.    

※인용문헌 
<빨치산 사령관 ‘이영회’의 삶과 투쟁> 주철희(2015), 
<남도문화연구> 제28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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