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래대’(春來臺)에서 봄을 기다린다.

산청시대 2019-04-04 (목) 14:13 5년전 21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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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동천 입

 

지막 마을 초입에 있는 ‘자연동천’
남명과 덕계, 고개 넘나들며 교류
1902년 석각·1912년 춘래정 건립

매화를 필두로 하여 노란 산수유, 개나리, 연분홍 진달래 등이 피기 시작하며 봄이 성큼 우리 곁에 다가온 온 듯하다.
금서면 왕등재 아래 절골(예전에 ‘안심사’라는 절이 있었다 하여 ‘절 골’이라 부른다)에서 시작한 계곡물은 ‘새정지’(新亭)삼거리에 이르러 수철에서 내려온 물과 합류한다.
지막(紙幕)의 지명은 본래 芝幕이었다. 마을 뒷산에 산약초의 하나인 지초(芝草)가 많아 막(幕)을 쳐놓고 채취하였다 하여 芝幕이라 불렀으나, 이후 닥(楮)이 더 유명해지며 종이를 만들기 시작하여 종이 ‘지’(紙)자로 바뀌었다고 한다.

종이 만들면서 ‘지막’(紙幕)으로 바꿔

마을 동쪽으로는 구불구불 지방도 59호가 덕산으로 이어진다. 옛날에는 이 고개를 넘을 때 밤 한 말을 지고가다 다 까먹으면 고개에 오른다고 하여 ‘밤말재“라고 했다는데 거기서 변형되어 지금은 ’밤머리재‘라 불린다.
덕산에 은거하던 남명 조식(1501~1572) 선생과 산청에 계셨던 덕계(德溪) 오건(吳健, 1521~1574) 선생은 사제지간으로 이 고개를 넘나들며 서로 교류를 하였다고 전해지는데, 지막 마을 초입에 있는 ‘자연동천’(紫煙洞天)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호리병 목처럼 잘록한 이곳 양편으로 고목이 서 있고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르며, 그 옆 절벽에 ‘자연동천’(紫煙洞天), ‘춘래대’(春來臺), ‘덕계오선생장구지소’(德溪吳先生杖?之所)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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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동천 암각

‘자연동천’, ‘덕계오선생장구지소’ 새겨

예로부터 선비들은 높은 산에 싸여 그윽하고 운치 있는 계곡에는 무슨 동천(洞天)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자연(紫烟)에서 ‘紫’는 신선이나 제왕이 사는 신성한 곳이라는 의미가 있어 자연(紫烟)이라는 단어는 옛 한시에 자주 등장한다.
춘래대 석각은 1902년에 새겼으며, 10년 뒤인 1912년에 그 위에다 춘래정을 짓기 시작하여 1913년에 낙성식을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춘래정을 지으려고 터를 닦으면서 지렛대로 바위를 들었더니 바위 밑에서 학이 한 마리 나와 하늘로 날아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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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동천의 지막계곡

바위 아래서 ‘학’ 한 마리 나와 날아

덕계 선생이 스승인 남명 선생을 만나면 봄과 같이 따스함을 느껴 스승이 오는 것이 마치 봄이 오는 것과 같다 하여 춘래(春來)라고 하였다하나 겨울에는 산에 눈이 쌓여 왕래를 할 수 없으니 어서 봄이 와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조급한 마음으로 밤머리재 바로 아래인 이곳에 머물며 봄을 재촉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본다.  
그렇다면 이곳에 자연(紫煙)이라 붙인 것도 현대적 해석으로, 춘래정에 앉아 봄이 오는 계곡을 내려다보니 마치 담배연기처럼 자줏빛 물안개가 모락모락 올라와서 붙이지 않았을까?
이 자연동천에서 시작하여 위로 지막 계곡은 여름이면 피서객이 몰려드는 자연발생유원지다. 무심코 지나가다 이렇게 바위에 새긴 글자 하나를 통해 우리는 선인들의 숨결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詠春(영춘)-봄을 노래하다-                 
春來臺?雨燕斜(춘래대사우연사) 춘래대 정자에 비가내리니 제비가 날아들고
柳岸銜泥向客家(류안함니향객가) 버들가 진흙을 물어 객가로 향한다.
?意錦箋箋底事(속의금전전저사) 마음을 집중하고 비단에 글을 적으려니
無人院落落幽花(무인원락락유화) 사람 없는 뜰에 그윽한 꽃만 떨어진다.

민영인 / 문화부장

참고 문헌
<산청의 명소와 이야기> 손성모
<산청 지명고> 산청문화원
<산청석각명문총람> 산청문화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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