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예찬(8) 남사예담촌

산청시대 2019-06-06 (목) 21:53 4년전 1721  

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마을 제1호!
이 마을이 700년을 줄기차게 달려 온 역사 속에는 선비들의 고고한 정신문화를 키워준 온상, 명가 고택(古宅)을 비롯하여 그 마당에서 주인과 함께 절의를 다지면서 오랜 세월 함께 한 매화나무가 있었으며, 더하여 이웃을 연결하는 아름다운 담장길이 지금도 고스란히 살아 숨 쉬는 품격 높은 마을, 여기가 산청이 자랑하는 남사 예담촌이다.
  
예담촌의 첫 자랑꺼리는 마을이 지닌 풍수지리다.
전문가들은 이 마을의 풍수지리를 ‘쌍용교구’(雙龍交?)형 명당으로 설명한다. 마을을 싸고 있는 이구산(尼丘山)과 당산(堂山)이 흡사 암수 두 마리 용이 서로 머리와 꼬리를 물고 어우러져 있는 형태를 이루고 있고 마을 곁으로 흐르는 사수(泗水)가 마을 경관을 더욱 아름답게 연출 하고 있다는 해설이다.

둘째로, 마을 명문가(名門家)에 이어오는 격조 높은 정신문화이다.
성주 이씨, 밀양 박씨, 진양 하씨를 비롯해 전주 최씨, 연일 정씨 등이 그 대표적인 집안으로 그들이 닦아 온 정신세계를 바탕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한 노력과 봉사가 오늘의 예담촌을 있게 한 것으로 생각된다.

문화재로 등록된 성주 이씨 사효재(思孝齋), 밀양 박씨 이사재 (尼思齋), 진양 하씨 원정구려(元正舊廬), 전주 최씨 고가(古家), 연일 정씨 사양정사(泗陽精舍)가 지닌 위용과 품위가 한옥의 멋과 집안의 영예를 말해주고 있고, 집 마당에는 하나같이 매화나무를 심어 선비의 절의를 다지기도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집 주인의 성씨를 따라 하씨매, 박씨매, 이씨매, 정씨매, 최씨매 등의 정겨운 이름도 붙여 남사5매라는 모양새까지 잘 갖추어 놓았다.

골목길 고가 입구에 선 수령 300년을 넘기는 회화나무는 악귀로부터 마을을 지키면서 700세 매화나무와 함께 후예들을 올바른 선비로 만들겠다는 조상들의 깊은 뜻을 안고 견뎌온 세월을 생각하면서 그저 어른들의 선견지명에 탄복할 따름이다.

셋째, 예담촌이라는 이름의 바탕이 된 담장길이다.
길 모양이 직선인 듯 굽어지고 굽어들다 곧게 뻗은 오묘한 조화 속에서 높은 예술성이 돋보이는 멋진 길은 무려 5km를 넘는데 이 가운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잘 정리된 3,2Km 남사 옛 마을담장이 2006년에 문화재로 등록되어 있는 예담촌의 얼굴이다.
아름다운 풍수지리가 인걸을 배출하고 다듬어진 인재는 횃불이 되어 이바지 해 온 자랑스러운 마을, 산청의 제6경으로 오른 남사예담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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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망대 정자서 본 남사예담촌 전경

[시조]      

           

지키는 담이던가, 나누는 울이던가
지엄한 가르침에 주고받던 인정까지
옛 담에 서린 사연이 골목길에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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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산청을 빛낸 홍보대사 ‘산청 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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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원 용호동에 자리하고 있는 경남도교육청 앞을 지나다 보면 청사 정문 안으로 작은 타원형 화단에 길쭉한 바윗돌 하나가 소나무를 업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이 돌의 고향이 산청군 단성면 청계리다

1994년 초 산청에 들린 강신화 경남도교육감이 “도교육청 정원 조경용으로 쓸 돌 하나를 구해 달라”는 부탁을 하고 가셨는데 다음 날 당시 조진래 군수님과 군 의회 김기조(작고) 의장님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더니 “우리 산청 돌이 도교육청에 긴요하게 쓰인다면 좋은 일”이라며 수소문 끝에 청계리 산턱에 도로를 내면서 나온 돌이 마을 근처 개울둑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소정의 절차를 거쳐 창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경남도교육청에서는 조경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중앙현관 바로 앞에 ‘수반에 심긴 나무’ 형상으로 공사를 해서 일단락이 되었는데, 후일 돌 값의 몇 배에 해당하는 예산을 보내 와서 해당 학교와 산청지역 교육환경 개선비로 활용하고 마무리를 지었다.
일이 끝나고 3년을 넘길 무렵, 다시 도교육청으로 자리가 옮겨져 어른과 함께 이 돌 앞을 지날 때면 “저 돌이 산청 돌인데...”로 시작해서 산청 이야기를 계속하는 바람에 교육청 참모진들로부터 ‘산청 돌’이라는 이름까지 얻게 된 것이다.

그 시절 함께 돌 앞을 거닐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인사들은 어디론지 헤어져 갔지만 간간이 돌을 만나 옛날을 그려보는 세월이 25년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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