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지역 문화유적 시리즈(10) 년 매출 180조원의 도요타 자동차, 문익점 선생의 우리 목화에서 시작
지난 2월 23일 이낙연 국무총리의 면화시배지 방문을 계기로 산청군은 문익점 생가 복원사업을 추진하는 등 현창사업에 매진하고 있다.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 입구의 목화 화분 일본 나고야 시에 위치한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 초입에는 하얀 목화송이가 달린 화분이 하나 놓여 있다.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한 도요타의 100년 가까운 역사적 발전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마련한 기념관의 전시장에는 도요타는 물론 일본 기계공업의 역사도 한 눈에 살펴볼 수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 기념관 전시물의 첫 시작이 왜 목화 화분에서 시작되고 있을까? 목화는 전통산업 제치고 경제 전면에 나서 여기에는 우리나라 고려시대 문익점 선생이 들여온 목화와 관련된 놀라운 사연이 숨겨져 있다. 면포는 일본 무역에서 가장 많은 품목으로 조선시대에는 곡식으로 내던 세금을 면포로 내게 하는 조세제도의 개정이 이루어짐으로써 목화는 화폐의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조선초기부터 대중화된 무명은 광물, 소금과 함께 조선의 3대 기간산업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당시 피폐한 농촌경제를 살리고 국가경제를 일으키는 중심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자 대외교역에서도 목화는 중심에 자리 잡게 되는데 면포는 일본과의 무역에서 가장 많이 요청되는 품목이자 지불수단이었다. 1470년(성종 원년) 8월에 일본은 급히 조선에 사절을 보내 면포 5천 필, 백저포 1천 필, 쌀 5천 석을 요청하였고, 연이어 1476년(성종7)과 1482년(성종18)에는 대마도주 소 사다쿠니가 특사를 보내 면포를 줄 것을 요청해와 면포 3,206필을 주었다는 기록에서 당시 면포는 일본에서도 아주 귀중한 생필품으로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서 면화 재배법·직조기술 배워간 일본 그러다가 일본은 조선에서 면화 종자를 얻어갔다. 면화 재배법과 직조기술을 배워간 것은 17세기 말이나 일반 서민에게 널리 보급된 것은 18세기 말부터였다. 17세기에 작성된 일본농서인 <청량기>(淸良記)에 명과 거래가 단절되자 조선으로부터 면포를 수입하면서 목화씨도 함께 들어온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도요타 사키치는 1867년 시즈오카 현의 작은 마을에서 평범한 목수이자 농부의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사키치는 소학교 4학년을 마치고 학업을 중단하는데, 당시 할머니가 고생스럽게 면포를 짜는 모습을 보고 반드시 힘들이지 않고 베를 짤 수 있는 직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다짐했다. 조선에서 들어온 목화는 생활에 유용한 것이지만 베가 짜이기까지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치는 노동력의 소모가 많았던 것이다. ‘도요타 목제인력직기’ 최초 특허 획득 사키치는 오랜 시간 수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직기개발을 계속하여 23살 되던 해에 종래의 수동직기를 개량하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도요타 목제인력직기’로 최초의 특허를 획득한 것이다. 그 후에도 계속 연구하여 29세인 1896년에 ‘목제동력직기’를 만들어냈다. 1906년에는 입체식 직기인 ‘환상직기’를 발명함으로써 19개국에 특허를 출원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그리고는 죽기 전 아들 도요타 기이치로에게는 1910년 미국에서 본 자동차에 매력을 느껴 자동차 사업을 하라는 유훈을 남겨 도요타가 자동차사업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도요타는 이 목화애서 시작되었다’ 그래서 ‘도요타 산업기술 기념관’의 목화 화분에는 ‘도요타는 이 목화애서 시작되었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날의 도요타는 결국 조선에서 전래된 목화에서 비롯되었다. 문익점 선생이 원나라의 들판에 하얗게 핀 목화솜을 바라보며 삼베옷으로 혹독한 추위에 고통 받는 백성들을 생각한 애민과 인간존중이 일본으로 건너가 힘들게 베를 짜는 할머니에 대한 손자의 안타까운 마음으로 이어진 것이다.
글·사진 / 민영인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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