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예찬9] 남명 조식 선생 유적을 찾아

산청시대 2019-07-04 (목) 09:37 4년전 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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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선생이 61세가 되던 1561년(명종 16년)에 산청 덕산으로 이거 하시고 1572년 72세로 생애를 마감하시기까지 이곳에서 생활하시면서 후학 양성에 남긴 흔적은 산천재를 비롯하여 세심정, 덕천서원, 남명기념관 등에 가득한데 이를 하나로 엮어 관리하고 있는 것이 사적 305호로 지정한 ‘남명 조식 유적‘이다.
이 유적지는 지리산 천왕봉과 덕천강을 배경으로 하고 있어 의미가 크다.

‘산천재’(山天齋)는 남명선생이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것으로 1818년에 고쳐지었다. 2개의 현판은 조선 시대에 조윤형과 이익회가 쓴 것으로 전서체 현판이 조윤형의 글씨다. 선생이 직접 심었다는 수령 450년의 ‘남명매’(南冥梅)는 산청 3매 중 하나로 이름이 높다.

‘세심정’(洗心亭)은 산천재에서 수학하면서 휴식을 취하던 장소로 1682년(선조16년)에 건립되었고 덕천강을 바라보는 아름다운 쉼터로 이름이 높은 정자다.
선생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576년(선조9년)에 그 제자들이 건립한 덕천서원(德川書院)은 1608년(광해군 원년)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며 현 건물은 1926년에 고쳐지은 것이다.

‘남명기념관’(南冥紀念館)은 선생을 기리기 위해 탄생 500주년이던 2001년 설립을 추진해 2004년 8월 개관하였고 관련 자료들을 보관하여 선생의 학덕과 정신을 기리고 전수하는 중심역할을 해 내고 있다. 경내에 있는 신도비는 우암 송시열 선생이 비문을 썼고 산천재 뒷산에 있는 묘소는 생전에 직접 잡아둔 자리로 알려져 있다.

이 유적지가 산청 9경의 한 자리를 빛내게 된 것은 사적 하나하나가 지닌 외형적인 무게보다는 여기에 담긴 선생의 덕망과 체취가 더욱 중요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리라.
아득한 그 옛날, 선생이 읊으신 두류산가에 이르셨으니…….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

 

<시조>
하늘을 찌른 절의 <단성소>로 던져두고
양단수 벗을 삼아 ‘산천재’에 머무시며
‘경의’로 펼친 가르침, 온 누리를 밝힌다.

 

<단상>          

남명 선생의 시조(時調)

남명 선생이 남긴 시문(詩文)은 많았으나 시조는 그 수가 많지 않아 아쉽다.
‘두류산가’(頭流山歌)나 ‘서산낙일가’(西山落日歌)로 불리는 두 수의 시조는 알고 있었는데 이번에 산청에 살고 계시는 남명의 후손 한 어른의 도움으로 귀한 한 수를 알게 되어 이외의 소득을 본 셈이다.
산청 덕산을 배경으로 쓴 시조로 흔히 ‘두류산가’로 불리는 작품이다.   

두류산 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도화 뜬 맑은 물에 산영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요 나는 옌가 하노라

다음은 조선조 중종임금이 돌아가심을 애통해 하며 쓴 시조이다.

삼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벗 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지다 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아래 작품은 이번에 알게 된 시조로 초나라 항우 일화와 관련된 작품이다.
서초패왕으로 대우받고 살던 항우가 마지막 전투에서 패하자 애마 우추마와 애첩 우미인을 바라보면서 지었다는 고사를 바탕으로 남긴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다.
     
부헙코 섬겨올손 아마도 서초 패왕
긧동 천하야 어드나 못 어드나
천리마 절대가인을 뉘를 주고 니거니
들뜨고 싱거운 마음은 아마도 서초패왕  
그까짓 것 천하야 얻으나 못 얻으나
천리마 절대가인을 누를 주고 가리오 
 
세 번째 시조를 알고 싶어 남명기념관의 한 해설사와 연결이 되었는데 잘 아는 분을 소개해 주겠다기에 직감으로 월람 조종명 선생을 떠올리며 물었더니, 그렇다면서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반갑게 맞으시는 목소리에 청산유수로 답을 주시는 바람에 숙제는 바로 해결되었고 잠시만의 대화로 백년지기처럼이나 가까운 정을 나누었다.
월람은 남명 선생의 사상과 이론을 비롯한 신구문학과 지역사회, 인맥까지를 훤히 꿰뚫고 있는 산청의 백과사전이시다. 도와주신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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