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 화산華山을 찾아서

산청시대 2021-03-17 (수) 01:26 3년전 14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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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과 한국선비문화연구원

길을 잘 찾아야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다. 길의 경로를 찾지 못하면 헤매다가 도달하지 못하고 중도에서 낭패를 보고 만다.
도통道通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의 뜻은 ‘사물의 이치를 깊이 깨달아 통함’이라 되어 있다. 쉽게 말하자면 ‘길이 막히지 않고 통한다’는 뜻일 것이다.

남명선생은 20세에 진사 생원 초시와 문과 초시에 급제했으나 21세에 문과 회시에 나아가 합격하지 못했다. 시험에 답안을 쓰는 문체가 고 문체여서 시험관의 채점하는 눈높이에 맞추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 금문체의 책인 당시 중국의 신간 서적, <성리대전>性理大全(명나라 영락제의 명으로 호광 등 42명의 학자가 송·원대의 학자 120여명의 성리설을 집대성한 책. 전체 70권. 1415년 완성. 1419년 우리나라 간행)을 구해서 읽었다.

그 책에 노재 허형(魯齋 許衡 1209~1281)이 ‘이윤伊尹의 뜻을 뜻으로 삼고, 안자 子의 학문을 학문으로 삼아, 벼슬길에 나가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으면 지키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글을 읽었다.
이 말이 선생의 학문적 고뇌에 확실한 방향을 제시해 준 것이다.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이 있다. ‘어제까지는 태양이 지구를 돌았는데 오늘부터는 지구가 태양을 돈다.’는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가치의 변환을 말한다.

그 시대 양반 지식인이 할 수 있는 일은 공부해서 과거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고 부귀영화를 누리는 것, 이것이 사대부가 할 수 있는 당연한 사명으로 알았던 시대였다. 마침내 위인지학爲人之學(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학문)에서 위기지학爲己之學(자신의 본마음을 밝혀 그것을 실천하는 학문)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그 뒤 어머니의 강력한 권유로 향시에 나가 1.2등을 한 바 있으나, 어머니를 설득하여 과거를 폐하고 위기지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38세 때 이언적(李彦迪1491~1934 字 復古 號 晦齋 本貫 驪州) 이림(李霖 1501~1564 字 仲望 本貫 咸安) 등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 전생서 주부, 종부시 주부 등의 벼슬이 잇달아 내렸으나 사퇴하였다. 55세 때 단성 현감에 임명되었다. 이때 ‘을묘사직소’를 올려 벼슬 못하는 이유를 조목조목 밝히고 국정 전반에 대하여 신랄하게 헌책하고 비판했다.

그 뒤로 연달아 벼슬로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다가 1566년 8월에 상서원 판관으로 다시 부르자 10월 3일 대궐에 들어가 숙배하고 명종을 만나 정치 학문의 방법을 이야기하고, 일을 함께할 임금이 못 된다고 판단, 11월에 지리산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나라와 민생을 걱정하여 때가 오면 현실 정치에 나갈 생각은 있었지만, 때를 얻지 못했다. 불우했다는 말이 있는데 불우不遇는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다. ‘맞는 때, 맞는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는 말이 된다. 이윤이 탕 임금을 만나 천하를 평정하고 왕도정치를 이루고 태평성대를 이루었던 것이 바로 허노재가 이른바 ‘이윤의 뜻을 뜻으로…’하는 말인 것이다.

선생은 청년 시절부터 이윤과 안자의 두 갈래 길을 고민하다가, 4대 사화가 연달아 일어나고 성군이 나와 왕도정치를 펴지 못하는 시기에 출처의 대절을 세워 안자의 길을 선택하고 바른길을, 학문의 완성을 추구해서 늘 현실 세계를 걱정하면서도 신령스러운 이상향 화산을 평생의 계획으로 찾았고 그 찾은 곳이 바로 덕산인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오악五岳이 있다. 중국에도 오악이 있다. 옛날에는 중국의 오악을 갈 수 없고 너무 아득하여 더욱 신성시했을 것이다.
필자도 서안은 두어 번 가보았지만, 화산은 가보지 못했다. 서안에서 한 시간 반 거리라 하는데 인연이 닿지 않았다. 지금도 가보고 싶다. 가서 선생이 그리도 바라던 화산의 정수를 느끼고 싶지만, 몸이 허락을 주지 않을 것이니, 그것은 내 분수에 먼 일이 되고 말았다. 높이 2,435m의 험준한 바위산이라 한다. 오악 중 서악西岳이다. 이 산에서 많은 사람이 도를 깨쳤다는 신성시하는 산이다.

남명선생은 우리나라의 여러 곳을 다녀서 살아보았다. 삼가에서 태어났지만 26세까지는 서울에서 살았고, 소년 시절에는 아버지의 고을살이를 따라 함경도 단천에 옮아 산적도 있다. 아버지의 상을 마치고는 처향인 김해에서, 다시 고향 삼가에서, 만년에는 덕산으로 와 십여 년을 살다가 생을 마쳤다. 선생은 지리산을 신성시하여 그 어느 곳엔가 유토피아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끊임없이 탐색을 계속하다가 지금의 산청 땅 덕산을 만년의 장수藏修와 강학처講學處로 삼은 것이다.

선생은 <유두류록>遊頭流錄의 끝부분에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이번 여행을 함께한 여러 사람이, 내가 두류산에 자주 다녀서 그 사정을 상세히 알 것이라고 하여, 나로 하여금 이번 여행의 전말을 기록하도록 했다. 내 일찍이 이 두류산에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고, 청학동靑鶴洞과 신응동神凝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고,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으며,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으며,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다. 그러니 어찌 다만 산수만을 탐하여 왕래하기를 번거로워하지 않은 것이겠는가? 나름으로 평생 계획을 세우고 있었으니, 오직 화산의 한 모퉁이를 빌려 그곳을 일생을 마칠 장소로 삼으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이 마음과 어긋나서 머무를 수 없음을 알고, 배회하고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며 나오곤 하였으니, …

선생이 두류산을 처음 유람한 것은 1528년 아버지의 삼년상을 마친 후, 서울 친구 성우(成遇 1495~1546 字 仲慮, 성운의 중형, 을사사화에 화를 입음)가 상문하러 내려와 같이 두류산을 유람했다. 이 유람록을 보면 열 한차례가 되고 이 유람록을 쓴 때까지를 합산하면 열두 차례가 된다.

<유두류록>은 1558(명종 13)년 4월 10일부터 26일까지의 기록이다. 일행은 진주목사 김홍, 이공량(李公亮 1500~1565, 남명의 자형), 이희안(李希顔 1504~1559 김안국 문인 유일로 천거 고령 현감), 이정(李楨 1512~1571), 조환(曺桓 남명 동생) 등 사십여 명이다.
위 인용문을 보면 왜 절실하게 두류산 어느 곳에 살 곳을 찾았던가 하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하여 마침내 1561년 사륜동에 거처를 정하고 삼간 서재를 지어 산천재山天齋라 편액을 걸었다. 평생을 눈물겹게 찾던 곳을 정한 것이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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