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 붓을 들면서

산청시대 2021-03-17 (수) 01:37 3년전 1952  

<남명 일대기> 3월부터 내년 6월까지 연재
저자는 남명 14세손 조종명 전 산청군의원
‘남명과 의병장’ 주제 드라마 제작도 모색

 

<산청시대>가 ‘경의 사상’을 고양하고 널리 알리기 위해 지구촌 사람 누구나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남명 일대기>를 3월부터 연재합니다.
저자는 남명 14세 손인 월람 조종명(80) 전 산청군의원으로 남명선생의 숨은 이야기를 중심으로 글을 엮어 나갈 계획입니다.
조 전 의원의 글은 내년 6월까지 연재할 예정이며, 남명선생 타계 450주년인 2022년 모둠 글을 책으로 출간해 역사 기록으로 간직할 것입니다.
또 경남도와 산청군 등 관계기관과 협의해 남명 일대기부터 임진왜란 의병장 활약까지를 다룬 드라마를 제작하는 계획을 모색해 나갈 것입니다.
시인이자 수필가이신 조종명 전 의원이 ‘산수’(傘壽)에 들면서 붓으로 남길 고귀한 필적은 우리나라 중심 사상에 남명이 자리 잡고, 또 국민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길 고대합니다.           

<편집자 주>

 

붓을 들면서

 6c6aa8eb0c6bfd7c4084c4f127c57c31_1615912

남명선생에 대해 설명하는 조종명 이사

 

우리가 살고 있지만, 지리산 또는 덕산은 어떤 곳인가? 선생의 흔적은 어떻게 남아 있는가?

강정화 교수는 <남명과 지리산 유람>에서 이렇게 썼다.
남명의 지리산 유람은 이후 후학들의 지리산 유람의 전범典範이 되어 수백 년 동안 지리산 유람에 언급되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수많은 지리산 마니아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그가 걸었던 그 길을 따라 걸으며 그의 생각과 감회에 공감하고, 지리산에 남아 있는 그의 흔적을 찾으려 애쓴다. 그렇지만 이를 위한 안내서도 안내자도 없는 것이 작금의 실정이다. 따라서 이 글은 책을 펼치는 순간, 마치 남명과 함께 그곳에 서 있는듯한 느낌이 들도록 만들려 노력하였다. 그와 함께 지리산을 다시 걸어보는 것처럼 말이다. 학술대회장에서 만난 엄정嚴正하기만 한 남명이 아니라, 유람온 남명을 만나는 것, 이것이 첫 번째 목적이다. (‘책 머리에’ 중에서)
이렇듯 남명과 지리산 천왕봉과의 인연은 필연적이었다. 이후 지리산은 남명의 산으로 불리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지리산 천왕봉에 올라 사방을 조망하던 유람자들은 동남쪽 덕산 방향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남명을 떠올렸고, 심지어는 지리산을 ‘덕산’이라 일컫기도 하였다. 마치 ‘남명과 덕산 그리고 천왕봉’을 하나의 세트로 인식하게 하였다. (그 책 p37)

최석기 교수는 <남명학의 본질과 특색>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남명은 산천재에서 천왕봉을 통해 바로 천도인 성誠의 경지에 도달하려 한 것이다. 이 성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존양存養하고 성찰省察하며 극기복례克己復禮하여 항상 진실한 마음을 보존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 이런 수행 방법은 인류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것일 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그렇게까지 존양·극치를 철저하게 했던 사람은 없다. … 공자의 제자 안회도 남명처럼 공부하여 석 달 동안 인仁을 한 번도 어기지 않는 경지까지 올랐다고 하는데, 남명도 그런 경지에 올랐을 것이다. (그 책 p71)

함양 사람 박여량(朴汝樑 1554~1611)은 1610년 9월 2일부터 9월 8일까지 두류산 유람을 하면서 그의 유람록인 <두류산일록>頭流山日錄에서 내가 천 길 봉우리 위에 올라와서 남명선생이 크게 은둔하신 기상을 상상해보건대, 다시 천 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격이다.하였다.

최석기 교수는 <남명 정신과 문자의 향기>에서 남명을 누구보다 잘 알았던 성운成運은 남명의 묘비 문을 지으면서 이렇게 썼다.고 했다.

그 세상사를 잊지 못해 나라를 걱정하고 민생에 상심했다. 매번 달 밝은 청명한 밤이면 홀로 앉아 슬피 노래 부르고 노래를 마친 뒤에는 눈물을 흘렸다. 곁에 있던 사람도 그런 마음을 알지 못했다. (p285)

18세기 실학을 일으킨 이익李瀷은 남명과 퇴계를 이렇게 말했다. 북도는 인仁을 숭상하고, 남도는 의義를 주로 하였다. 그리하여 유교의 교화와 기절氣節을 숭상함이 바다처럼 넓고 산처럼 우뚝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문명이 여기서 절정에 달했다. 이 두 선생 밑에는 박사급 제자들이 수백 명 배출되었다.

서울 살던 최영경崔永慶 형제는 한양에 살다가 무도한 세상을 보고 남명이 사는 진주로 내려왔다. 서울서 지방으로 유학을 온 것이다. 이는 우리 역사상 단 한 번 있었던 일이다.
그 문명의 자부심을 되살려 우리나라 대표 브랜드로 만들어야 한다. 그 중심에 5백 년 전통의 선비문화가 있다. 그 중심에 남명이 우뚝 서 있다. (그 책 p311~315)

2022년은 남명선생 서세逝世 450주년이 된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화산인가? 지리산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선비문화란 우리에게 무엇인가? 왜 남명인가? 이런 질문을 던지며, 앞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가려 한다. 많은 질정과 조언을 바랍니다.

6c6aa8eb0c6bfd7c4084c4f127c57c31_1615912
​2019년 2월 남명기념관을 찾은 이낙연 당시 국무총리가 조종명 이사로부터 신명사도 설명을 듣고 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정치
자치행정
선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