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놈, 경의검 어따 팔아 묵었네?” 1960년대 말경, 어느 대종회 날(대종회는 매년 정월 초닷새가 정일이다.)이었다. 어떤 종인 한 분이 고함을 질렀다. “아무개 네 이놈 경의검 어따 팔아 묵었네?” 그 말을 들은 당시 내임 지냈던 분이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서 작은 소리로 “그만 내가 죽어야지”라고 혼자 말처럼 푸념하는 말을 똑똑히 들은 기억이 있다. 그분이 내임을 지내신 기간을 경임록(經任錄)을 상고해 보았더니, 1963년부터 1968년까지였다. 따라서 경의검의 분실 시기는 그 기간 어느 해이었을 것이다. 내가 본 것도 그즈음이었을 것이다. 덕천서원 숭덕사에 보관했던 문중의 보물인 선생의 패검을 잃어버렸으니 이는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그 전후에 어떤 종로(경암공)에게 들은 기억으로는 분실된 경의검 외에 장검도 있었다 한다. 1950년 동지 무렵 북괴군이 패퇴해 북으로 가는 길이 끊어져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인민군 장교 한 사람이 장검과 패도를 차보더니 그대로 차고 갔다고 했다. 그분의 기억이 맞는다면 경의검 외에 장검도 있었으리라. 아무리 사정을 해보았지만, 생사여탈이 그 사람 마음에 달려 있던 시절, 막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 사람이 지니고 북한으로 갔을까? 그렇잖으면 지리산 어느 계곡에 묻혀 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고대일록>(孤臺日錄)(정경운 1556~?이 쓴 1592년~1609년까지의 일기)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진주성이 함락된 닷새 후인 1593년 7월 5일 왜군이 덕산에 와서 분탕질했다고 한다. 그때 덕천서원, 산천재, 여재실, 종택 할 것 없이 모두 불탔다. ◆경의회의 발기 : (회칙 등 자료를 찾지 못했음) 60년대 초쯤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대포 초등학교’ 옆의 논에서 보리 갈이를 하고 있는데 초등학교 교사 두 분(조태환, 조규환)이 찾아와서 학부모와 다툰 이야기를 했다. 즉 ‘일가도 항렬도 몰라서 되겠냐’는 것과 ‘일가라면 서로 얼굴을 알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것. 그러자면 ‘모임을 만들어 친목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날 밤 학교 숙직실에 다시 만나서 모임의 이름은 ‘경의회’로 하자는 의견 일치를 보고 며칠 후에 ‘덕산다방’에서 여러 일가를 모아 발기가 되었고 그 모임은 지금까지 존속되고 있다.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간행 : 1957년 정유 봄에 도회(道會: 도내 유림 회의)를 열고 연원록 편찬 유사(有司)를 정했다. 도유사 김재수(단성 법물), 감교(勘校) 권창현(단성 교동), 도병규(단성 창안), 조상하(진주 덕산), 정영석(진주 병천), 시종 열심히 일한 사람은 성만수(진주 금동) 조철섭(진주 덕산)이다. 편찬 소임은 교정으로 되어 있는 하우선의 발문(跋文)에 기록된 분들이다. 찬집소임(纂輯所任)은 도유사 한 분, 부유사(副有司) 두 분, 도청 여섯 분, 교정 두 분, 편집 일곱 분, 서사 세 분, 감인 다섯 분, 직월 세 분, 직일 일곱 분, 모두 쉰세 분의 방대한 조직이었지만, 담헌 하우선(진주 안계)과 후천 조철섭은 당시 서원의 내외임이었고 이 두 분이 거의 주도해서 온갖 역경을 극복하고 1960년 경자에 간행했다. ◆<남명선생 문집> 첫 국역 : 1974년 2월에 번역을 위해 42만 9천 원이 모금되었다. 조계섭, 조의생, 조백환이 박종한 교장을 찾아가 번역 사업을 의논하고, 조원섭, 조봉조 두 분이 서울의 김충열 박사, 조규철 선생을 만나 논의했다. 번역은 이익성 선생에 맡기었다. 진주 금호출판사에서 인쇄, 1980년 첫 번역 발간이 이루어졌다.
◆김충렬 교수의 출현 : 1967년 김 교수는 서울대학교 ‘한국 철학사’ 강의를 맡게 되었다. 그때 남명선생을 강의했다. 1970년 고려대학교로 옮겨 강의할 때, 조을환이라는 학생을 만나 남명선생 후손이 산청 덕산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975년에 조영기(당시 새마을 연수원 부원장)를 만나 덕산에 오게 되었다. 덕천서원 사당에 참배하고, 산천재는 물론 소천서당 등을 둘러 3일간 체류했다. 이 일이 있고 나서 남명선생 연구의 새 지평이 열리게 되었다 해도 과한 말이 아니리라.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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