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세상을 일깨우다(2)

산청시대 2021-03-30 (화) 13:39 3년전 1675  

‘임금 산소는 태조왕릉, 민간 산소는 남명 묘소가 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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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묘소

지뢰음(地雷吟)
오늘은 이 시로 이야기를 시작하려 한다. 선생의 칠언절구(七言絶句) 시다. 제목이 어렵다. ‘남명학 연구소’ 번역본에는 ‘지뢰음’의 번역을 ‘복괘를 두고 읊다’라고 번역했다. 더 어렵다. 우선 번역문부터 보자.

地雷吟(지뢰음)
易象分明見地雷(역상분명견지뇌) 
人心何昧善端開(인심하매선단개) 
祇應萌蘖如山木(기응맹얼여산목)
莫遣牛羊日日來(막견우양일일래)
역의 현상이 분명하게 ‘지뢰괘’에 나타나는데,
사람 마음속 착한 실마리의 열림을 어찌 모르랴.
다만 싹트는 것이 응당 우산의 나무와 같으니,
소와 양으로 하여금 날마다 오지 않게 하게나.

(‘남명의 한시’ p380 류진희 역)

주역의 ‘지뢰복괘’(地雷復卦)를 빌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피력하였다. <맹자> ‘고자상편’(告子上篇)에 ‘우산지목’(牛山之木) 이야기가 있다. 우산은 전국시대 제나라 교외에 있었는데, 본디 울창한 나무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도끼로 베어 버렸다. 싹과 움이 나지만 소나 양이 자라자마자 먹어버리므로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본래 재목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어찌 산의 본래 모습이었겠는가?’라고 했다.
우리가 사물을 볼 때 현재의 모습을 보고 그 정체를 단정해서는 안 된다. 모든 사람이 본래 착한 본성을 타고났지만, 나쁜 환경의 영향으로 착한 본성을 잃은 상태를, 사람의 본래 모습으로 착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소나 양이 와서 부드러운 새순을 뜯어 먹지 못하게 해야 할 것이다.
이 시를 선택해 서두에 실은 까닭은 우리가 남명선생의 참모습을 알기 위해 노력하자는 뜻이다. 필자는 몇 년 전에 진주향교의 경서반을 따라서 곡부와 산둥성 일대 성현 유적을 답심한 적이 있다, 유복을 갖추어 입고 성현의 사당마다 제사를 올리고 이상필 교수의 해설을 듣는 일정이었다. 그때 우산을 가본 적이 있다. 지금도 민둥산이었다. <맹자>를 읽어보지 않았으면 그 조그만 산을 보고 무슨 감회가 있었겠는가?
성인은 백 세의 스승이니 찾아서 참배하고 기리고 배워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오래전 풍수 대가라는 장영훈(1954~2008)은 남명선생의 산소를 둘러보고 ‘임금 산소는 동구릉의 태조왕릉이 제일이고, 민간인 산소는 남명선생 묘소가 제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 선생의 해설은, 회룡고조(回龍顧祖) 잠두혈(蠶頭穴)인데, 곧 지리산 천왕봉을 조산(祖山)으로 해서 중봉, 써리봉, 조개골산(서흘산), 왕등재, 밤머리재(율월현 栗月峴), 웅석봉, 의방산으로 약 팔십 리를 돌아서 그 할아버지를 돌아보는 형국이라 했다. 맞은편 안산은 옥녀봉인데,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이라 했다. 마을 이름도 사리(絲里)이니 누에가 실을 뽑아낸 마을이란 뜻이 된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형국이 재미있고 좋았으면 됐지 더 무슨 발복은 있지도 바랄 것도 없다. 선생 이후에 더 크고 훌륭한 인물도, 부귀영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렵고 힘든 일만 일어났다.

장 선생을 만나고 난 뒤로 그의 제자인 김 교수라는 분이 답사반을 데리고 여러 차례 왔다. 같이 남사, 입석 등 여러 곳을 둘러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니 남명선생 묘소를 볼 것이 아니라, 선대 묘소를 봐야 어떤 분의 음덕으로 대 선생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아니요?’ 그랬더니 김 교수도 선대 묘소가 보고 싶다 했다.

날을 잡아 삼가 읍내에서 그와 만나 선생의 선대, 삼대 묘소가 있는 삼가면 판현의 갓 골(편현 板峴 관동冠洞, 상판리上板里)로 갔다. 나는 선산에 성묘차 여러 번 간 적이 있지만, 풍수를 아는 분과는 처음이었다. 김 교수는 묘정에서 전방을 한참 바라보더니 설명을 한다.
“저 앞을 보십시오, 가까운 산은 청룡 백호가 안아주지 못하고 바깥으로 뻗어졌습니다. 그러나 멀리 보면, 외청룡 외백호 등은 모두 겹겹으로 감싸고 있습니다. 이는 선생의 가까운 시기에는 배반하는 일이 많았고, 지금은 선생 사업과 연구가 활발한 것을 증명합니다. 앞으로 선생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고 했다.

묘소의 해발 높이가 얼마(200m 미만) 높지도 않은데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아득히 남해 바다로 생각되는 곳이 가물가물하다. 아버지 판교공 이상 3대의 묘소가 있으니 어느 분의 음택으로 발복한 것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여하간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옛날 아호를 후천(後川)으로 쓰는 종조부님은 거의 평생을 덕천서원 사업에 바치셨다. 선생문집 개간,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간행 등. 나는 이 어른의 덕으로 숭덕사에서 ‘경의검’을 보았다. ‘경의검’은 원래 칼의 자루가 상아로 된 흰 자루와 물소 뿔로 만든 검은색 자루로 두 자루가 있었다. 내가 본 것은 하얀 상아로 만든 칼자루에 칼날은 번쩍번쩍 윤이 났다.

후천 종조부는 가세가 너무 가난해서 손님을 모시고 늘 큰집인 우리 집으로 오셨다. 접빈객도 어려웠지만 귀한 손님을 그 어른의 형님과 만나게 하려는 우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사랑에 쉬고 잘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늘 필자의 어머님이 술밥 간 접빈객에 노고가 많으셨다.

후천 종조부님은 늘 입버릇처럼 ‘선생 사업처럼 말이 많을꼬?’ 하셨다. 인조반정 이후의 수많은 어려운 일, 서원의 훼철과 중건, 신도비 부비(剖碑) 사건, 그런 일들에 관해서 갓 쓴 어른들이 사랑에서 하시던 말씀을 그땐 잘 알아듣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어 흘려들었다. 그렇게 중요한 말씀들을, 이제라도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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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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