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세상을 일깨우다(2)‘임금 산소는 태조왕릉, 민간 산소는 남명 묘소가 제일’ 지뢰음(地雷吟) 地雷吟(지뢰음) 주역의 ‘지뢰복괘’(地雷復卦)를 빌어, 사람이 선한 마음을 가지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피력하였다. <맹자> ‘고자상편’(告子上篇)에 ‘우산지목’(牛山之木) 이야기가 있다. 우산은 전국시대 제나라 교외에 있었는데, 본디 울창한 나무로 덮여 있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도끼로 베어 버렸다. 싹과 움이 나지만 소나 양이 자라자마자 먹어버리므로 민둥산이 되어버렸다. ‘그 모습을 보고 본래 재목이 없었다고 생각하는데, 이 어찌 산의 본래 모습이었겠는가?’라고 했다. 오래전 풍수 대가라는 장영훈(1954~2008)은 남명선생의 산소를 둘러보고 ‘임금 산소는 동구릉의 태조왕릉이 제일이고, 민간인 산소는 남명선생 묘소가 제일’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장 선생의 해설은, 회룡고조(回龍顧祖) 잠두혈(蠶頭穴)인데, 곧 지리산 천왕봉을 조산(祖山)으로 해서 중봉, 써리봉, 조개골산(서흘산), 왕등재, 밤머리재(율월현 栗月峴), 웅석봉, 의방산으로 약 팔십 리를 돌아서 그 할아버지를 돌아보는 형국이라 했다. 맞은편 안산은 옥녀봉인데, 옥녀가 베를 짜는 모습이라 했다. 마을 이름도 사리(絲里)이니 누에가 실을 뽑아낸 마을이란 뜻이 된다. 그저 그렇다는 것이다. 형국이 재미있고 좋았으면 됐지 더 무슨 발복은 있지도 바랄 것도 없다. 선생 이후에 더 크고 훌륭한 인물도, 부귀영화도 일어나지 않았고, 어렵고 힘든 일만 일어났다. 장 선생을 만나고 난 뒤로 그의 제자인 김 교수라는 분이 답사반을 데리고 여러 차례 왔다. 같이 남사, 입석 등 여러 곳을 둘러 보기도 했다. 어느 날 나는 그에게 물었다. ‘아니 남명선생 묘소를 볼 것이 아니라, 선대 묘소를 봐야 어떤 분의 음덕으로 대 선생이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을 것 아니요?’ 그랬더니 김 교수도 선대 묘소가 보고 싶다 했다. 날을 잡아 삼가 읍내에서 그와 만나 선생의 선대, 삼대 묘소가 있는 삼가면 판현의 갓 골(편현 板峴 관동冠洞, 상판리上板里)로 갔다. 나는 선산에 성묘차 여러 번 간 적이 있지만, 풍수를 아는 분과는 처음이었다. 김 교수는 묘정에서 전방을 한참 바라보더니 설명을 한다. 묘소의 해발 높이가 얼마(200m 미만) 높지도 않은데 멀리 지리산이 보이고, 아득히 남해 바다로 생각되는 곳이 가물가물하다. 아버지 판교공 이상 3대의 묘소가 있으니 어느 분의 음택으로 발복한 것인지는 묻지도 않았다. 여하간 좋다는 말에 기분이 좋은 하루였다. 옛날 아호를 후천(後川)으로 쓰는 종조부님은 거의 평생을 덕천서원 사업에 바치셨다. 선생문집 개간,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 간행 등. 나는 이 어른의 덕으로 숭덕사에서 ‘경의검’을 보았다. ‘경의검’은 원래 칼의 자루가 상아로 된 흰 자루와 물소 뿔로 만든 검은색 자루로 두 자루가 있었다. 내가 본 것은 하얀 상아로 만든 칼자루에 칼날은 번쩍번쩍 윤이 났다. 후천 종조부는 가세가 너무 가난해서 손님을 모시고 늘 큰집인 우리 집으로 오셨다. 접빈객도 어려웠지만 귀한 손님을 그 어른의 형님과 만나게 하려는 우애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사랑에 쉬고 잘 수 있게 하기 위해서이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늘 필자의 어머님이 술밥 간 접빈객에 노고가 많으셨다. 후천 종조부님은 늘 입버릇처럼 ‘선생 사업처럼 말이 많을꼬?’ 하셨다. 인조반정 이후의 수많은 어려운 일, 서원의 훼철과 중건, 신도비 부비(剖碑) 사건, 그런 일들에 관해서 갓 쓴 어른들이 사랑에서 하시던 말씀을 그땐 잘 알아듣지도 못했고 관심도 없어 흘려들었다. 그렇게 중요한 말씀들을, 이제라도 기억나는 대로 기록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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