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3)

산청시대 2021-04-15 (목) 11:31 2년전 1696  

남명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이유 밝힌 <엄광론>

 

출처(出處)


출처, 출은 ‘나간다’는 뜻이고, 처는 ‘들어앉아 있다’는 뜻이다.

내가 하급 공무원에 있었던 1960년대 말 1970년대 초는 ‘잘살아 보세’를 기치로 ‘새마을 운동’이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던 시절이었다. 식량 증산이 제일 급했던 시절이었다. ‘미동법 480Ⅱ’ 소위 ‘잉여 농산물’을 원조받아서 주린 배를 달래야 했던 시절, 배불리 밥 먹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한 과제였다. ‘통일벼’라는 획기적인 증수 벼 품종을 강제로 보급하던 시기였다.
농민들에게 권장하는데, 밥맛이 떨어지고 냉해에 약해, 가을 수확기에 날씨가 일찍 추우면 냉해를 입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사실은 우리 집에서도 싫어했다. 고민 끝에 나는 사표를 던졌다. 내 머릿속에는 자꾸 ‘기소불욕을 물시어인’(己所不欲 勿施於人 내가 하기 싫은 일을 남에게 하게 하지 말아라)이라는 문자가 괴롭혔기 때문이었다.
그땐 월급을 1만원도 못 받던 시절이라 공무원이 먹고살기가 힘들기도 했다. 그걸 뭐 잘했다고 지금 술회하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사람은 그런 양심이랄까, 내 능력이 모자라거나 나의 양심에 비추어 옳지 않다고 판단할 때 물러날 줄 아는 그런 마음. 구차하지 않은 그런 마음이 있어서 사회생활에 출처의 한 준칙이 된다는 것을 나를 비추어 알 수 있지 않겠나 하는 것이다.

장한(張翰?~359 추정)이라는 사람은 진(晋)나라 대사마동조연(大司馬東曹?)이라는 벼슬을 했다. 세상이 소란할 기미가 보이자, 가을바람을 빗대어, 고향의 순채 나물과 농어회가 생각난다면서 사직하고 돌아가 버렸다. 어찌 한낱 즐나물과 고기회 때문에 사직했겠는가?

이 고사를 시(詩)로 멋지게 표현한 분이 있다. 바로 이인로(李仁老 1152~1220)다. 그중 일부를 소개한다.
   
사공유흥유쌍극(謝公遺興唯雙?) 사공의 남긴 흥은 오로지 한 켤레 나막신이요,
장한귀심만일범(張翰歸心滿一帆) 장한의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한 돛폭에 가득하구나.

 
그러나 선생의 ‘출처’는 장한의 ‘출처’와는 달랐다. 선생의 ‘출처’에 관한 연구자들의 여러 인용문을 통해서 선생의 ‘출처관’을 알아보고자 한다.
선생이 어느 날 동강 김우옹(東岡 金宇?1540~1603)과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를 앉혀놓고 말했다.

‘자네들이 출처에 있어서 대략이나마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나는 자네들을 허여하겠다. 사군자士君子의 대절大節은 오직 출처 하는 한 가지 일에 달려 있을 따름이다.’ <남명집 언행총록>

남명은 ‘논’(論)을 한 편 남겼는데, 그 제목이 <엄광론>(嚴光論)이다.
엄광(BC39~AD41)이라는 사람에 대해 인물을 평한 것인데, 그 속에는 자신의 지절(志節)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다. 엄광은 후한(後漢)을 다시 일으킨 광무제(光武帝)와 동문수학한 벗이다. 엄광의 자가 자릉(子陵)이기 때문에 흔히 엄자릉으로 불린다. 그는 절강성 회계 출신이다. 젊어서부터 명성이 높았다. 광무제가 즉위하자 엄광은 성명을 바꾸고 은거하여 나타나지 않았다. 광무제는 엄광을 어진 사람이라고 여겨 전국에 명을 내려 찾았다. 조정으로 초빙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에 제수하였으나, 엄광은 지조를 굽히지 않고 절강성 부춘산으로 돌아가 농사를 짓고, 낚시를 하며 살았다.
엄광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을 두고, 세상에서는 이런저런 평이 있었다. 어떤 사람은 광무제가 왕도정치를 행할 만한 그릇이 아니었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라 하고, 어떤 사람은 어려서부터 광무제와 사귀면서 그 인품을 잘 알기 때문에 나아가지 않은 것이라 하였다. 이처럼 엄광이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대에는 여러 논평이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해 남명은 자신의 견해를 제시한 것이다.… 후대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지조를 지키며 산 처사處士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최석기 <남명학의 본질과 특색>)

엄광론은 다음과 같이 시작하고 있다.
‘광무황제 27(서기 52)년 처사 엄광을 불러서 간의대부에 제수했다. 그러나 엄광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고 부춘산으로 돌아가서 낚시질하다가 생을 마쳤다. 나는 엄자릉이 성인의 도를 추구한 인물이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눈여겨볼 것이 엄광을 ‘처사’로 지칭한 점과 ‘성인의 도를 추구한 인물’로 본 것이다. 자신이 그렇게 논평하는 이유를 그 아래에 논의하고 있다. 그중에 선비가 천자나 제후에게 신하 노릇 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들의 포부가 크기 때문이라 하였다. 그러면서 ‘용을 잡는 기술을 가진 사람은 희생을 잡는 부엌에 들어가지 않고, 왕도정치를 보좌할 수 있는 사람은 패도정치를 하는 나라에 들어가지 않는 법이다.’라고 하여, 엄광은 포부가 크기 때문에 벼슬하지 않고 물러난 것이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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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 조식 선생 초상화

남명은 또 엄광에 대해 ‘자릉의 언론과 기풍을 상고하건대, 뜻이 높아 세상을 깔보고, 영원히 세상에서 떠나가고 돌아보지도 않는 사람은 아니다. 특히 이윤伊尹이나 부열傅說과 같은 부류인데,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다.’라고 평하였다.

남명은 이 글의 말미에서 엄광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의 비평에 대해 논하면서 ‘후세에 평하는 사람들이 패도정치를 실현하려는 관점에서 자릉을 본다면 광무제에게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았음을 지나쳤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왕도정치를 실현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이라는 관점에서 자릉을 평한다면, 그가 광무제를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음을, 마땅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신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엄광은 성인의 도를 추구한 사람이다.’라고 논하였다.
이 <엄광론>은 남명이 벼슬길에 끝까지 나아가지 않은 이유와 자신의 포부를 아울러 밝힌 글로, 엄광을 빌어 자기 뜻을 밝힌 것이다. (최석기 <남명학의 본질과 특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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