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4)

산청시대 2021-04-27 (화) 22:27 2년전 1740  

산 보고 물 보고 사람도 보고

청학의 자취를 찾아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이제야 <유두류록>(遊頭流錄 두류산을 유람한 기록) 코스를 그 일부나마 답사하는 기회를 얻었다. 어쩌면 이제라도 청학이 상징하는 바 진실하고 아름다운 세계를 꿈꿀 수 있는 단계에 들어선 것 같아 기쁘고 영광된 일이라고도 할 수 있다.
2003년 4월 12일 오후 봉곡동의 연구원 세미나실에 들어서니 세미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토론을 마치고 몇 대의 승용차에 분승하여 하동으로 떠났다.
우리는 진주를 떠난 지 채 한 시간이 안 되어 땅거미 속에 정지한 듯 구비 치고 있는 섬진강을 따라 평사낙안(平沙落雁)의 땅 악양 고을에 들어섰다. 참석자는 김충렬 원장과 조희환 교수, 설석규, 정우락, 사재명, 송준식, 전익수, 조구호, 양기석, 조종호, 조종명이었다.

노 선생(老先生 남명선생을 말함. 이하 노 선생이라 기록함) 일행이 유람을 떠난 것이 1558년 초여름, 곧 4월 초 10일이었으니, 음력 4월이고 오늘은 양력 4월이니 절후를 보아서는 거의 한 달 앞인 셈이다.
445년 전 그때에는 10일에 이 황강(黃江 이희안 1504~1559)이 초계에서 와 뇌룡사雷龍舍에 같이 주무시고, 11일에 삼가를 출발하여 진주 마현(馬峴 말티고개)의 자형이 되시는 안분당 이공량(1500~1565) 집에서 주무시고, 진주 목사 김홍과 합류하는 식으로 일행을 이루는 보름에 걸친 여행길이었지만, 오늘 우리는 아침에 전국 각지에서 모여들어 오후 늦도록 노 선생의 문인들에 관한 학술행사를 마치고 일거에 하동까지 가게 되었으니, 여러 날의 일을 단 몇 시간에 이루어버린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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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불사


노 선생 행차는 4월 16일에야 하동을 지나 배 위에서 섬진강의 일출을 보았다. ‘아침 해가 막 떠오르니 검푸른 물결이 붉게 타는듯하고 양쪽 언덕 푸른 산 그림자가 물결 밑에 거꾸로 비치고 있었다.’고 하였다.

4월 13일, 우리는 바로 신응동으로 향했다. 고금이 다르니 변화가 어찌 없을 수 있겠는가! 산수는 그대로일 터이나 산록의 개량 밤나무들, 비탈의 잘 가꾸어진 녹차 밭은 자연을 생업에 응용하는 지혜일 터이다. 산 위의 나무들은 죽고 나고 하면서 인간처럼 자기들의 세계를 이어가고 있는 것이겠지.
‘신응사는 쌍계사에서 십 리쯤 되는 곳에 있고, 그 사이에 보잘 것 없는 가게가 두어 군데 있었다.’고 노 선생이 썼는데 지금은 가게가 많이 있을 뿐, 지나가는 나그네를 위한 집들이 있기는 그때도 마찬가지였나 보다.
왕성초등학교 뒤편으로 돌아가니 깨어진 기왓장이 발길에 차이고 불에 탄듯한 다듬은 돌들이 흩어져 있다. 이곳이 신응사 터이다. 학교를 짓고 민가가 들어서서 옛 모습을 거의 찾을 수 없다. 담장 앞으로 가서 계곡을 바라보았다. 적당히 불어난 냇물은 맑기만 한데 하얀 꽃들이 떠내려오다가 빙 돌아서 어디로 사라진다.

‘절에 왔으나 문 안으로 들어갈 겨를도 없이 곧장 시냇가 반석에 가서 그 위에 죽 벌여 앉았다.’ 노 선생은 여기에서 ‘그대들은 비록 굴러떨어져 낭패를 볼지언정 이 자리를 잃지 말게나.’ 하였다. 혹 그분들 중에 뒷날 자리를 잃을 분이 있을 것을 예견한 것일까? 내 다시 이곳을 찾아오면 반나절을 저 바위에 앉아 깊은 상념에 잠겨보리라.

우리는 바쁘게 돌아 나와 칠불사로 향했다. 칠불사는 해발 800m 고지에 자리 잡고 있다. 가락국7 왕자가 이 산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 절 앞에는 영지(影池)가 있다. 아들을 찾아온 허황후가 장유 화상의 만류로 만나보지 못하고 이 영지에서 아들의 모습을 보았다는 슬픈 모성애의 전설이 전해 온다. 세계 건축사에 길이 남을 ‘아자방’(亞字房)은 9세기 말경 담공 선사가 축조했단다. 한 번도 개수한 일이 없고, 한번 불을 때면 한 달 동안 따뜻하다 한다. 일행의 눈길은 절집 기둥의 주련에 비쳤다.

山梅落盡野花飛, 谷口春殘客到稀(산매락진야화비, 곡구춘잔객도희)
산 매실 다 떨어지면 들꽃이 날리고, 산어귀 늦은 봄날 찾는 사람 드물구나.
遙望千峯紅樹裏, 杜鵑啼處一僧歸(요망천봉홍수리, 두견제처일승귀)
멀리 천봉을 바라보니 단풍이 가득한데, 두견이 울음 속에 한 스님이 돌아오네.

분명히 세속의 일은 아닌 초탈한 자연과 종교 분위기에 젖어본다. 글씨도 아름답고 글 뜻도 좋아 한 줄도 놓치기 싫다. 더욱이 불교에도 해박한 중천 선생의 해설이 곁들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칠불암을 내려온 우리는 쌍계 석문 앞의 주차장 근처에서 점심을 때우고 곧장 쌍계사로 향했다. 청학동을 찾을 참이다. 노 선생의 길을 따라가는 것이다.
쌍계사는 신라 성덕왕 21(722)년 대비·삼법 두 화상이 지어 ‘옥천사’라 했다가 이후 문성왕 2(840)년 범패의 종장인 ‘진감국사’가 중국 유학에서 돌아와 근처에 차나무를 심고 대가람을 중창했다. 정강왕(886)이 ‘쌍계사’라고 사명을 내렸다.
쌍계석문을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18현 창수유적비(十八賢唱酬遺蹟碑)가 보인다. 모두 노 선생의 문인이거나 재전 제자들이다.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身), 노파 이흘(蘆坡 李屹), 창주 하증(滄洲 河증), 사호 오장(思湖 吳長), 능허 박민(凌虛 朴敏), 봉강 조겸(鳳岡 趙&#16105;), 매죽헌 성박(梅竹軒 成&#37787;), 동계 권도(東溪 權濤), 매촌 문홍운(梅村 文弘運), 송대 하선(松臺 河璿), 동산 권극량(東山 權克亮),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 임곡 임진부(林谷 林眞&#24612;), 창주 허돈(滄州 許燉), 조은 한몽삼(釣隱 韓夢參), 강재 성호정(疆齋 成好正),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 추담 정외(秋潭 鄭&#38944;) 등이 오언절구를 창수한 것을 모두 새겨놓았다. 일세의 고결한 선비들이었으니, 혹은 높은 벼슬을 지냈고, 혹은 불러도 나가지 않은 어른들이었다.

팔영루를 들어서면 곧바로 ‘진감선사 대공탑비’를 볼 수 있다. ‘절 문으로부터 수십 걸음 떨어진 곳에 높이가 열 자나 되는 비석이 귀부 위에 우뚝 서 있는데 곧 최치원의 글과 글씨가 새겨져 있는 비석이다.’하였다.
비의 높이는 3.63m, 탑신의 높이는 2.2m. 귀부와 이수는 화강암이고, 비석은 대리석이다. 정강왕 2(887)년에 세웠고 최치원의 사산비(四山碑) 중의 하나로 국보 47호이다. 설선당, 적묵당, 청학루와 명부전까지 둘러보았다. 맨 뒤쪽에 ‘육조정상탑전’이 있다. 중국 선종의 제6대조 혜능대사의 정상 곧 두개골을 모셨다고 전하는 탑을 내부에 모시고 있는 금당이다. 절 북쪽으로 300m 되는 곳에 보물 380호인 ‘진감선사 부도’(885년 조성)가 있다. 그러나 갈 길이 총총하여 볼 수가 없었다. 돈오문 뒤로 나가면 청학동 불일폭포로 오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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