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5)

산청시대 2021-05-13 (목) 10:42 2년전 1616  

‘선생님이 오시니 봄이 오는 것 같네’

덕계 오건과 스승 남명 조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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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계서원 전경 / 사진 김종신

오늘은 산청의 큰 제자 덕계 오건 선생과 그의 스승 남명 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해 보려 한다. 진주 쪽에서 산청 읍내로 들어가는 어구에 꽃봉산이 있다. 그 옆으로 4차선 국도가 시원하게 뚫려 있고 약간 비스듬한 고개가 있는데, 이 고개를 ‘살고개’(쌀고개, 씰고개. 삵고개)라 한다. 막 고개를 넘으면서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큰 소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곳에 묘소가 보이고 그 옆에 기와집들이 보인다. 이곳이 지금 이야기하려 하는 덕계 오건(德溪 吳健, 자 자강子强 1521~1574) 선생의 탄생지이며 묘소가 있는 곳이고, 선생을 향사하는 서계서원(西溪書院)이다.

덕계 선생은 산음현 최초의 대과 급제자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사표 삼아야 할 큰 학자 정치가이다. 그런데도 덕계 선생의 기념비, 시비(詩碑) 하나 없다. 다행히 도로명 주소 사정할 때 필자가 심의위원이어서 산청 읍내에 ‘덕계로’를 도로명으로 정해서 기념케 한 바 있다.
왜 우리는 큰 인물을 기념하는데 이리도 인색할까?
옛 산청(산음현, 산청 차황 오부 생초 금서의 5개 읍면)하면 수계정, 환아정이 떠오르고 구형왕릉, 지곡사가 떠오른다. 유유히 굽이쳐 흐르는 경호강. 마치 곰처럼 떡 버티고 선 웅석봉. 그야말로 ‘지푼 골(깊은 골, 지품知品, 지품천, 심거深渠, 고순시국)’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 자긍심을 갖고 오순도순 잘살고 있다. 특히 덕계 선생은 산청인이 자존 하는 산청 정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데도 과연 선생을 잘 기억하고 있는지?
1793~1796년 현감을 지냈고 1795년 환아정을 중건한 이면제(李勉齊)는 <환아정 중수기>에 쓰기를 ‘정자가 허물어지면 이름도 따라 없어지고, 이름이 없어지면 고을도 없어질 것인데 그래도 되겠는가?’라고 했다. 우리가 유의해야 할 말이 아니겠는가? 이면제는 산음 현감을 지낸 이유간(李惟侃)의 아들 이경석(백간白軒 李景奭 1595~1671 중수 기문을 지었음. 병자호란 때 영의정. 문장으로 유명)의 후손이다. 이 환아정이 재건된다는 소식이 있어서 매우 반갑고 고맙다. 환아정이 재건되거든 그 앞에 덕계 선생의 기념비나 시비를 하나 세우기를 바란다.

덕계 선생은 관향이 함양이다. 산음현 덕천리(현 지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태실인 첨송각瞻松閣이 있다. 함양부원군 광휘光輝의 12세손으로 조부는 식軾이며, 부는 참봉 세기世紀이다. 어머니는 증산 훈도를 지낸 팔거 도영강都永康의 딸이다. 연보에 따르면 가문이 거창에서 산음현에 자리 잡은 것은 5대조인 직장공(인언仁彦 필자 주)부터이고, 석답촌石畓村(현 지막리, 필자 주)에 거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증조부 종은宗誾 대에 덕천리로 옮겼고 오건은 바로 여기서 태어났던 것이다.(이범직 <덕계 오건과 도학의 이해>)

선생은 어려서부터 단중端重하고 총명했다고 한다. 6.7세 때부터 부친에게 대학, 논어 등을 배웠지만, 11살 때 부친상을 당했다. 이때 ‘등을 어루만지며 하던 말씀(무배지어撫背之語)’. “내가 이렇게 죽으니 네가 누구에게 학문을 배워 사람이 되겠느냐?”를 평생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네 번의 상을 입어 모두 다섯 번 여묘廬墓살이를 했다(14세 조모상, 16세 조부상, 24세 모부인상, 25세 계조모상). 이런 효성이 임금께 알려지자, 조정으로부터 복호復戶(세금 부역 등 면제)의 은전을 받았다. 당시 산음 현감 유공작柳公綽이 선생의 뛰어난 학행을 알고 혼인을 주선하여 28살에 진사 광光의 딸 성주 이씨와 혼인하여 45세에 아들 하나를 얻으니 그가 사호 오장(思湖 吳長 1565~1617 학자 임란 창의)이다.

선생의 삶이 이처럼 기구하여 상을 모두 벗고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숙부 세강世綱과 외삼촌 도양필都養弼에게 공부를 배우는 한편, 정수암淨水庵(정수산에 있던 절인데 지금 없어졌다. 이때 안봉리 수월폭포 등에 유람하며 공부하였을 것이다. 필자 주)에서 공부했다.


-31살(1551) 때에야 삼가의 뇌룡정으로 남명 선생을 배알 했다.
-32세에 진사시 회시에 2등 합격,
-36세에 성균관에서 공부했다.
-38세에 대과에 합격했다. 이때 고경명, 기대승, 윤두수, 정유일, 구사맹, 황정욱, 정탁 등 35인이 동방 급제하였다.
-39세에 성주 훈도訓導에 제수되어, 한강 정구(寒岡 鄭逑, 1543~1620)가 덕계에게 배우게 되고 성주 목사인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1517~1563)과 교유하게 된다.
-43세에 도산으로 가서 퇴계 선생을 배알했다.
-44세에 성균관 학유에 제수되어 조정에 나갔고, 연이어 학정, 학록이 되어 중학中學을 관장했다.
-45세에 창경궁에서 일회一會(사헌부와 사관원에서 누구를 탄핵할 때의 모임)에 참석해 요승 보우普雨를 목 베라는 상소문을 지었다. 9월에 병가를 내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지곡사에서 도저작, 정매촌과 함께 남명 선생을 모시고 며칠을 지냈다.
-46세 1월 남명 선생을 모시고 지곡사에 모였다. 10월에 남명 선생이 임금의 부름으로 상경하자 한강으로 나가 맞이했다. 선생이 온 지 열흘 만에 남쪽으로 돌아가자 또 한강으로 나가 전송하였다.
-48세 병조좌랑, 사관원 정언, 예조좌랑에 제수.
-49세 공조좌랑, 정언, 전적, 사간원 헌납, 성균관 직강, 사헌부 지평 제수.
-50세 이조좌랑 제수, 8월 어사 겸 재상경차관御使兼災傷敬差官에 임명되어 호남지방을 조사, 실태 파악하여 세금포탈 군역 기피의 폐단 아룀. 12월 퇴계 선생을 곡.
-51세 이조좌랑 제수, 사양, 홍문관 부교리, 예조, 이조정랑 겸 지평 제수.
-52세 이조정랑 임명, 병가 귀향. 4월 남명 선생 장례식 거행. 성균 사성, 직강, 사헌부 장령, 홍문관 응교, 성균관 사예 임명.
-53세 사헌부 집의, 장악원 정, 성균관 사성, 홍문관 전한, 사인, 군기시 정, 전한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사임.
-54세(1574) 사헌부 집의, 종부시 정, 사인, 집의 임명 모두 불취. 7월 7일 병들어 24일 돌아가셨다. 11월 1일 장사.
-1606년 선조 39년 병오 서계 옆에 서원 건립. 한강寒岡이 선생 묘에 제사.
-1677년 사액 서계서원.
이상으로 덕계 선생의 연보를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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