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는 산해정

산청시대 2021-05-30 (일) 23:41 2년전 1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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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해정 있던 자리에 들어선 신산서원(김해시 블로그)

김해는 산해정山海亭과 신산서원新山書院이 있다. 임란 때 불탄 것을 다시 세우고 대대로 김해 유림들이 관리해 오다가 조선 말기에 훼철의 비운을 맞았다. 산해정은 복원되었으나 신산서원이 복원되지 못해 자손은 물론, 김해 유림의 숙원 사업이었다.
1990년부터 신산서원 복원을 위한 대화가 김해 유림, 남명과 신송계 선생의 후손 간에 깊이 진행되었다. 산해정을 일부 정비하고 뒤편에 사당을 신축하여 신산서원을 만들자는 것이다. 1992년 1월 28일(음력 신미 12월 24일) 11시 김해시 부원동 ‘상아예식장’에서 ‘신산서원 복원 발기대회’가 열리고, ‘신산서원 복원 추진위원회 회칙’이 통과되었다. 경남도, 김해군(추진 중 시로 승격됨), 김해 출신 국회의원과 긴밀한 협조 속에 김해와 인근 고을 유림, 남명·송계 양가의 모금이 전개되고 공사가 착착 진행되었다.
소요 공사비는 국도비, 시비 등 3억4,800여만원을 지원받고, 유림과 양 문중이 1억3,200만원 등 모두 4억8천만원으로 공사를 마치고 봉안 준비에 들어갔다.

현판 글씨는 고봉 최승락, 신산서원복설 상량문(新山書院復設 上梁文) 김철희(1915~2008), 신산서원 중건기重建記 이우성(1925~2017), 산해정 중수기(山海亭 重修記) 이우섭(1931~2007), 남명선생 봉안문 허권수, 송계선생 봉안문 이우섭 등의 글을 받아 걸었다. 집필자를 주선하고 글을 받아오는 사람은 하유집(1929~2019), 이강림, 노태원 제 씨들이다.
드디어 1999년 6월 12일 남명 송계 양선생을 봉안했다.

산해정의 산해山海의 의미를 무민당 박인(無悶堂 朴絪, 1583~1649)은 ‘산을 베고 바다에 임했다’(枕山臨海)로 해석했고, 면우 곽종석(?宇 郭鍾錫, 1846~1919)은 ‘태산에 올라 바다를 바라본다’(登泰山而觀於海)’는 뜻으로 보았다.
신산서원의 신산의 의미는, 신어산神魚山의 이름에서 신神과 신新의 발음이 같고, 주역 대축괘에 ‘나날이 새로워지는 것(日新)의 성대한덕(盛德)’이라고 하였기에 ‘신산新山’이란 이름을 붙였다.

1588(선조21)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동쪽 산기슭에, 부사 하진보(河晋寶, 1530~1580)가 고을 인사들과 의론하여 신산서원을 건립하였는데 정자正字 안희(安熹, 1551~1613)가 그 일을 주관하였다. 임란 때 불타고 1608(선조 41)년 안희, 황세열, 허경윤(1573~1646)등이 주도하여 산해정 옛터에 중건했다.
1609(광해원)년 사액되고 정인홍(1535~1623)이 원장이 되었다. 1616(광해8)년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1499~1562)을 조정에 상소하여 윤허를 받아 병향 享하였다. 1870(고종7)년 덕산의 덕천서원, 1871(고종8)년 합천의 용암서원, 김해의 신산서원과 산해정이 훼철되는 비운을 맞는다. 그런 와중에도 1890(고종27)년 하경도, 조종응, 허찬 등 3명의 유사가 산해정을 중건하고 3월 중정일에 남명 선생을 향사하였다. 그러다가 백 년이 흐른 1999년에야 의론이 크게 일어 서원의 규모를 갖추고 두 선생의 향사를 올리게 되었으니, 김해 고을 유림들의 정성이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오늘날 김해에 여러 가지로 선생 선양 운동이 일어나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 이에 그 대략을 적어 훗날 잊지 않게 한다.
선생이 지은 ‘한훤당 화병 발문’(寒暄堂 屛跋 한훤당 김굉필이 갑자사화로 사사賜死되자, 가산이 적몰되었다. 그 집에 안견이 그린 병풍이 있었는데, 거의 100년 후에 한훤당의 손자에게 돌아왔다)이 있다.
‘…잘 갈무리하는 사람은 하늘에 갈무리한다. 그 하늘의 실상은 태허(太虛 : 크게 공허함)이다. 공허하여 여러 공용功用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에 그 갈무리는 굳이 갈무리하지 않아도 사물이 달아나는 바가 없으며, 사람들이 아무도 그것을 다투지 않는다…’<남명집>
이 말씀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일까? 대현은 아무리 누가 눌러서 숨기려 해도 끝내 나타나 우리를 가르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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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봉황동 유적지

 

남명 시로 작곡한 음악CD 제작

 

김해는 그 뒤로 몇 차례 왕래했다. 각계각층 사람들, 사업가, 시인, 스님, 시의원, 음악가, 화가 등 다양한 인사들이 유복을 입고, 유건 쓴 복장으로 음악공연, 국악연주, 시 낭송 등을 한다. 김태근 필봉문학회 회장도 자주 다니며 김해의 ‘시 낭송가’ 들과 모임을 하곤 한다.
선생의 시를 번역해서 작곡한 노래는 정한이 사무친다. 번역은 김석계, 작곡은 장원재, 송정환이고, 편곡, 악기의 연주와 노래는 모두 회원들이다.
선생의 시중에 ‘설매雪梅’(눈 속의 매화), ‘쌍벽루雙碧樓’, ‘서신書信’(이증영과 이별할 때 주다) 등 이런 시를 노래로 만든 것이다. 이 노래가 CD로 만들어져 두 장을 사서, 한 장은 산청군 문화계에 주고 한 장은 자동차에 갖고 다니며 듣는다.
이런 사업은 모두 김석계 선생이 주도했다. 김석계씨는 ‘김석계 특허 법률사무소’를 경영하면서 ‘김해 특허지식 재산권 및 창업·기업발전연구회’ ‘신어 미래 기술 문화 플랫폼’을 수백 명의 회원들과 함께 운영하고 있다.
그 모임 회원이었던 김성관 씨는 (사)김해 남명정신문화연구원을 설립, 본인이 이사장이 되고 한상규 박사를 원장으로 초빙했다. 여러 차례 학술회의를 진행했으며, 올해 박선해 시인이 주도하는 <남명 문학>이라는 문학지를 창간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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