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7)

산청시대 2021-06-29 (화) 05:44 2년전 1779  

왕조시대, 대동사회 염원하다 실패한 혁명가 ‘정여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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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진안문화원)


유교 근본이념을 ‘대동사상’이라 한다.
자기를 잘 수양하면 자신에게만 좋을까? 물론이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좋을 것이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은 인류사회가 좋아지는 최고의 양약이다. 나를 좋은 사람으로 먼저 만들어야 한다. 그러면 그 아름다운 향기가, 마치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에 벌 나비가 찾아오듯, 주위로 퍼지면 다른 사람도 착해진다. 이것이 수기치인의 원리일 것이다. 맹자에 천작天爵, 인작人爵이라는 말이 있다. 천작은 하늘이 주는 벼슬이다. 인의충신仁義忠信하는 훌륭한 인격을 갖추는 것이 천작, 하늘이 준 벼슬이다. 공경대부公卿大夫 즉 정승 판서 같은 높은 벼슬은 인작이다(맹자孟子 고자상편告子上篇). 천작을 받은 후에 저절로 오는 인작을 받아야 임금을 도와 백성을 편안하게 다스릴 수 있을 뿐이다. 인작을 다투어서 취한 사람이 어찌 좋은 정치를 할 수 있겠는가?

3월 15일, 덕천서원 변명섭 해설사와 전북 진안군 죽도(鎭安郡 竹島)를 찾아갔다. 임진왜란 3년 전에 죽은 반항아, 혁명가가 쓰러진 자리가 보고 싶었다. 우리가 ‘정여립의 난’(정여립 1546~1589)이라고 알고 있는 현장. 진안군 성전면 수동리 내송마을, 죽도 안에는 두 집이 살고 있었다. 신정일 우리 땅 걷기 이사장과 문대성 향토 사학자, 손석기 진안향교 전교, 정성문 동래정씨 회장의 정성스러운 안내와 해설을 들었다.

정여립은 대과에 급제한 13년 후인 선조 16(1583)년 예조 좌랑에 오르면서 벼슬을 시작, 율곡 이이의 추천으로 홍문관 수찬에 발탁되었다. 수찬은 정6품직이지만 경연에 들어 하루에 두 번 임금과 마주 앉아 국정을 논하는 중요한 직책이다. 선조와 근접한 거리에서 임금의 그릇을 읽을 수 있었고, 따라서 세습군주제의 모순을 깨달았을 것으로 추정한다. 4월에 선조 18년 동인 이발(李潑 1544~1589)의 추천으로 다시 수찬이 되었지만, 얼마 후 사직하고 고향 전주로 내려왔다. 그리고는 ‘천하는 공물公物’이라는 대동사회의 기본강령을 내세우고 대동계를 조직, 1587 ‘정해왜변’에는 전주 부윤 남언경의 요청으로 왜적을 격퇴한 뒤 죽도로 들어가 많은 사람을 모아 글을 가르치고 무술을 연마했다. 그 수가 600을 넘었다 하는데 병력을 길러 임진왜란을 대비했다는 설도 있다. 유교의 대동사상과 정여립의 그것은 차이가 있다. 사람이 바라는 이상사회는 추구할 뿐이지 실현되지는 않는다고 누가 말했던가?
 
오늘날 민주주의 입장에서 본다면, 정여립 역모 사건은 민주 방벌(放伐 역성혁명으로 정통성을 인정받는 정권 탈취 방식)·민귀군경民貴君輕 등에 대한 자각과 실현을 스스로 기약하고 자임한, 당시로써는 상상할 수 없는 파천황적破天荒的 사건이었다고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김충렬, <기축옥사의 시말과 그 교훈>)

정여립이 어떤 스승에게서 학문을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렇지만 기축옥사에 집중적으로 화를 입은 사람들이 최부(1454~1504)의 제자들이었던 것으로 보아 최부의 후학이며 서경덕의 문인이었던 이중호(1512~1554 이발의 아비지)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남명의 문인이었던 김우옹, 정인홍과 가까웠던 것을 보면 남명의 학풍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정여립이 이항李恒의 문인인 변사정(1529~1596)을 칭찬한 사실이 있어 이항의 문하에 자주 출입하여 학문을 배웠을 가능성도 있다. (신정일, <정여립과 기축옥사> 2012)

기축년(1589, 선조22) 10월 22일 황해 감사 한준의 비밀 장계가 들어왔다. 안악 군수 이축, 재령 군수 박충간, 신천 군수 한응인 등이 역모 사건을 고변한 것이었다. 그 내용은 수찬을 지낸 전주에 사는 정여립이 모반해 괴수가 되었는데, 그 일당인 안악에 사는 조구가 밀고했다고 되어 있었다. 무려 1000여명의 사림들이 희생당한 피의 사화인 기축옥사의 서막이 서서히 오르고 있었다.

‘실패한 혁명도 혁명은 혁명이다.’라는 말이 있다. 그 엄혹한 왕조시대에 시대를 앞서 평등, 자유, 대동사회를 염원하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한 혁명가 정여립이다. 하지만 실패한 혁명가인 정여립의 대동사상(大同思想)은 허균의 변혁 사상인 ‘호민론’豪民論(민중은 물이나 불 또는 호랑이보다도 더 두려운 존재라는 사상), 정약용의 ‘탕무혁명론’湯武革命論(하·은·주 시대에 탕왕과 무왕이 왕조를 교체한 것)으로 다시 이어져 근 현대사의 ‘동학 농민 운동’으로 분출되었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정여립을 두고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군신강상설’君臣綱常說을 타파하려 한 동양의 위인이다. 그러나 <민약론>(民約論)을 저술한 루소와 동등한 역사적 인물이 되지 못한 것은 이후의 파란만장한 프랑스 혁명에 비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조선의 정여립은 크롬웰보다 60년 앞서 대동사상을 주장했다.(신정일,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당시 남명학파는 많은 인사가 화를 당했다. 먼저 최영경(崔永慶 1529~1590) 동생 최여경이 연루되어 국문을 받다가 장살杖殺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영경과 연관된 많은 인물이 화를 당하였다. 참봉 윤기신尹起莘은 최영경의 문인으로 이발李潑 형제와도 도의지교가 있었는데 장살 되었고, 참봉 유종지柳宗智는 조식 문인으로 최영경이 아끼던 인물인데 역시 장살 되었다. 이황종(李黃鍾1534~1590)은 최영경의 문인으로 영암에 살았는데 장살 되었다. 특히 조식의 고제인 김우옹(金宇? 1540~1603)도 회령으로 귀양을 갔다.

이처럼 기축옥사에 조식의 문도가 많이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당시 조정의 대신으로 화를 입은 사람은 김우옹, 조종도(趙宗道 1537~1597), 정개청, 유종지, 이발, 이호, 유몽정, 조대중, 이황종, 정언신, 정언지, 백유양, 홍종록 등이었으며, 나머지는 다 기록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이들 중에서 이발 이호, 유몽정, 백유양, 김빙은 장형으로 죽었고, 윤기신과 정개청은 장형을 맞고 유배 중에 죽었으며, 최영경은 옥사하였다. 연좌되어 유배된 자가 몇백 명이었는데, 조정의 신하 가운데 귀양 간 자는 정언신, 김우옹, 홍종록이며, 파출된 자도 수십 인이었다. (김강식 <선조 연간 최영경의 옥사와 정치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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