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8)

산청시대 2021-07-14 (수) 11:14 2년전 1774  

단재 신채호는 왜 정인홍 선생 연구에 평생을 바치려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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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선생 사당 합천 청람사에 봉안된 영정

광해군일기를 편찬하면서 정인홍(1535~1623)을 소인배의 전형인 양 기록했다. 또 이러한 추세는 정인홍의 향리 합천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군지인 <합천군 여지>(陜川郡 輿地)는 정인홍의 역사적 공과를 제쳐두고라도 영의정 출신의 그에 대해서 한 줄의 기록도 없을 정도다.
이점을 분개한 한말 언론인, 역사가, 독립운동가로 눈부신 활약을 한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 1880~1936)는 우리나라 역대 위인 가운데 삼걸三傑로 을지문덕, 이순신, 정인홍을 꼽았다.
신채호가 왜적에게 붙들려 중국 대련 감옥에 있을 때, 면회 온 동아일보 기자에게 ‘정인홍 선생 연구에 평생을 바치려고 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다’며 한탄했다.(영남학파 ‘내암 정인홍’ <매일신문>1983.2.7.-<정래암 사상 연구논총>(1995) 재인용)
 
한 인물의 평가는 사람이 죽으면 끝나는 것도 아닌가. 내암은 수백 년 지나 이제야 그 평가작업이 진행 중이다. 2017년 덕천·용암·신산 세 서원의 원지를 서둘러 내었다. 나도 죽을 때가 가까워지니 하나하나 정리를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덕천서원 건립 시의 내암의 역할은 찾지 못했다. <정래암 사상 연구론총>(鄭來庵思想 硏究論叢. 1994)에는 1607년 남계(함양 일두 정여창 선생 향)·덕산(산청군 시천면 남명 조식 향)·향천(합천 봉산 남명 조식 향) 3서원 원장이, 신산 원지에는 1609년 원장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덕천서원에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내암 연보의 개략부터 살펴보자.
정인홍의 본관은 서산瑞山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來庵이다. 고조 성검成儉이 무안 현감을 지냈는데, 이때 합천으로 이거해 살았다. 증조 희僖는 점필재 김종직(&#20308;畢齋 金宗直)의 문인이며 삼가 현감을 지냈다. 조부 언우彦佑와 부친 윤倫은 벼슬하지 않았다. 모친은 진양 강 씨로 충순위 눌(忠順衛 訥)의 따님이다. 합천 야로현 상왕산(현 매화산) 남쪽 남사촌(현 합천군 가야면 사촌리)에서 아들 삼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1535년. 중종30).
어린 시절 임훈林薰에게서 잠시 수학하다가 15세에 삼가 뇌룡정으로 남명 선생 문하에 들어 수학했다.

24세(1558)에 생원시에 합격한 후로 과업을 폐하다.
36세에 문경호文景虎를 비롯한 다수의 사류가 급문하다.
37세, 산천재로 스승 남명 선생 임종(임종하지 못했다는 설도 있다).
39세, ‘탁행지사’(卓行之士)라는 유일遺逸로서, 당시 오현사(五賢士. 서경덕 문인 이지함, 조식 문인 최영경과 정인홍, 이황 문인 조목, 이항 문인 김천일)의 일인으로 천거되어 육품직을 제수받고 황간 현감이 되어, 당대 최고 선정관으로 뽑혔다.
50세, 부친상, 이후 여러 번 벼슬로 불렀으나 모두 사퇴.
55세(1589년, 선조22), 기축사화 발생, 1천여 명 인물 숙청됨.
58세(1592년, 선조25), 임진왜란 발발, 합천 숭산동에서 김면金沔과 5월 10일 창의. 무게와 안언역 등에서 왜군 전멸하거나 격퇴, 3차에 걸친 전투 끝에 성주 성 탈환, 이에 조정에서는 제용감 정, 성주 목사 등 제수, 11월 체찰사 이원익의 주청으로 ‘영남의병대장’ 제수 장문의 상소 사퇴. 이후 여러 차례 벼슬 제수 모두 사퇴.
60세, 제용감 정에 통정대부로 가자 되고 상주 목사, 영해 부사 제수, 사직 봉사 올리고 불취,
63세(1597년, 선조30), 왜구의 재침(정유재란)이 있자 임진란 때와는 달리 의병 창의가 전무한 상태에서 유일하게 창의 모병하고 성주에 주둔하고 있던 명나라 군대와 협력.
65세, 형조참의 제수, 불취.
66세, 용양위 부호군에 부付.
68세, 승정원 동부승지 제수, 불취. 2월에 가선대부 사헌부 대사헌 불취.
70세(1604년, 선조37), <남명집> 갑진본 해인사에서 간행. 이때 <발남명집설>(跋南冥集說)에서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
71세,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공을 인정받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일등에 녹훈.
73세(1607년, 선조40), 람계, 덕산, 향천 3서원 원장이 됨.
74세, 유영경을 참하라는 소를 올려, 왕의 노여움을 사 영변으로 유배, 2월 광해군 등극 유배지로 가기 전에 해배, 3월 ‘한성부판윤’ 제수, 불취.
75세(1609년, 광해1년), ‘대사헌 겸 세자보양관’(大司憲 兼 世子輔養官) 제수, 불취.
76세, 우찬성 제수, 불취.
77세, 문묘종사 문제로 ‘회퇴출향소’(晦退黜享疏)올림. 성균관 유생들에 의해 ‘청금록’(靑衿錄) 삭제됨.
78세, 우의정 제수, 불취. 15차 사직소 올림, 광해군 2차 인대引對.
79세, ‘정운일등공신’(定運一等功臣) 녹훈, 반당伴? 10인 노비奴婢 5구, 구사丘史 5명, 전田 40결結, 은자銀子 10량, 표리表裏 1단, 내구마內&#24271;馬 1필 하사. 5월 계축옥사 일어나다. 6월, 10월, 11월 3차에 걸쳐 영창대군 ‘신구소’(伸救疏) 올리다.
80세(1614년, 광해6), 판중추부사 제수 불취. 정월 좌의정 제수 불취. ‘서령부원군’(瑞寧府院君) 봉작. 11월 ‘남명 선생 문정공 영의정’(文貞公 領議政) 증시 증작.
81세, 궤장机杖 하사. 상경 3차 왕을 직대하여 구황책救荒策을 건의하여 실행케 함. 폐모론에 전은으로 강력히 반대하고 왕의 간곡한 만류에도 귀향하고 죽을 때까지 도성에 들어가지 않았다.
82세(1616년, 광해8), 11월 삼각산 아래 남명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 건립되고 ‘백운서원’(白雲書院)이란 이름으로 사액 되었다.
83세, 영의정에 제수, 3차례의 사직소 낸 후 죽을 때까지 문자로 계진啓陳한 일 없음.
89세(1623년, 광해15), 인조반정 일어남. 폐모론을 주장하였다는 날조된 죄명을 쓰고 합천에서 도성으로 압송된 5일 만에 처형되었다. 문인 정온鄭蘊, 이대기李大期 등이 처형에 강력히 반대하고 스승의 원통함을 호소하였다.
1908년(순종2), 칙명으로 죄명 탕척되고 복작됨.
1911년, 문집 15권 7책, 실기 1권 간행.
1931년, 단재 신채호는 <정인홍 약전>을 가장 애석한 복고腹稿로 자신과 함께 매몰될지 모르겠다고 한탄하였다. 또한 외세침략에 대해서는 역사상 대표적 인물론에서 외적 방어의 행동과 정신을 찾으려 했고 그릇되어가는 현실에서의 혁명적 정신을 정인홍에서 찾으려 하였다.(신채호전집 해제-홍이섭)-이 내암 선생 연보는 <내암사상 연구논총>의 <정기철 편>과 남명학연구원, <내암 정인홍>의 권인호 <내암 정인홍의 생애와 경세사상 연구>에서 인용하였음.

정인홍은 남명 조식의 고제高弟이다. 어려서부터 임하林下에서 글을 읽어 자못 기절氣節로 자허自許했고, 영남 선비들의 대부분이 그를 추도하여 일컫기를 내암 선생이라고 했다. 불세不世의 은명恩命을 입어 초야에서 일어남에, 군왕은 자리를 비우고 기다렸고 조야朝野는 눈을 씻고 그의 풍채를 바라보았다. 그는 먼저 군왕의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이어서 시무時務의 급한 것을 진달陳達하여 한두 사류 중에서 뛰어난 자와 마음을 합하고 뜻을 같이하여 가부可否를 논의하고 조론朝論의 시비와 용사用捨의 득실을 밝혀 점차 바르게 하고 보구補求하는 데 힘썼다. 청류들은 그에 의중하고 흥망은 그를 통쾌하게 여겼다. 인홍은 조금도 조야의 기대에 어긋남이 없었다.<조선왕조실록>(권24 선조실록)

요컨대 내암은 선조가 “그의 굳센 절개는 백단으로 꺾으려 해도 꺾을 수 없다.”고 하고, 광해군이 “충성심과 굳센 절개는 우뚝하여 미치기 어렵다.”고 하며 제자 오여은吳汝?이 “방정하고 높고 엄하다.”고 한 것처럼 의義로 일관한 생을 추구하였다.(남명학연구원, <내암 정인홍> <내암 정인홍의 실천적 교육 정신> 신창호)

1983년에 영인된 <내암집 해제>에서 김충열은 ‘…워낙 오랜 세월을 두고 일방적으로 폄억貶抑되어 왔고 더욱이 정치적 이해관계보다 학파 간의 대립으로 받아온 질시가 더 컸기 때문에 그리 쉽게 풀리지는 않을 것 같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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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의병정신을 기리는 합천 창의사


지금 합천 삼가 ‘용암서원’ 원생(유림)의 일각에서는 내암을 배향하자는 논의가 일고 있다. 나는 대답하기를 “조금 더 기다리자, 내암의 문인 후손들 집안에서조차 자기 조상의 문인됨을 부정하고 있는 형편이다. 조금 더 기다리자.” 이렇게 답했다.
학자들에 견해를 물어보니, 찬반이 양분된다. ‘바로 배향해야 한다’와 ‘득보다 실이 많다’로. 이 연재물을 읽는 독자들은 부디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각에서 역사를 바라보고 판단하는 소양을 갖추어 바른 견해를 가지시기를 간절히 바랄 뿐이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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