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조식 선생의 유적지를 따라(2)

산청시대 2017-02-22 (수) 15:19 7년전 3705  

백성만을 위한 나라를 꿈꾼 남명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해 덕을 새롭게 한다’는 산천재
산천재(山天齋)로 걸음을 옮겼다. 산천재는 명종 16년(1561년) 선생이 제자들에게 학문을 가르친 곳으로 산천(山天)은 ‘굳세고 독실한 마음으로 공부하여 날로 덕을 새롭게 한다’는 의미다. 들어서는 입구에는 선생의 시 한 편이 새겨져 있다. 산천재에 들어서자 지리산의 넉넉한 풍경이 들어온다. 지리산을 좋아하고 사랑해 열두 번이나 찾았던 지리산을 닮은 선생이 왜 이곳에서 터를 잡고 생을 마쳤는지 알 수 있다.
마당 한가운데는 오랜 시간의 흔적을 나무 외과 수술을 받은 흔적을 온몸에 드러내는 남명매(梅)가 있다. 오른편 산천재 주련에는 덕산 복거(德山卜居) 시 한 수가 적혀 있다.

‘봄 산 아래쪽엔 향기로운 풀 없으랴마는/ 천제 사는 곳과 가까운 천왕봉만 좋아라/ 맨손으로 돌아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 은하수처럼 십리 흐르는 물마시고도 남으리./’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기념관 옆으로 선생의 묘소 가는 길로 천천히 걸었다. 5분 정도 걷자 선생의 묘가 나온다. 임금이 불러도 나가지 않는 선비 징사(徵士)였던 선생은 “나를 처사(處士)라고 부르는 것이 좋겠다. 이것이 내 평생 뜻이다. 처사라고 쓰지 않고 관직을 쓴다면 이것은 나의 뜻과 어긋나는 것이다.”라며 세상을 떠나기 전에 병시중을 들던 제자에게 말했다.

벼슬하지 않고 숨어 사는 선비를 뜻하는 처사로 불리길 원했던 선생의 바람과 달리 묘에는 ‘징사 증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문정공 남명 조선생지묘(徵士贈大匡輔國崇錄大夫議政府領議政文貞公南冥曺之墓)’라고 적혀 있다. 선생의 바람처럼 ‘처사조남명지묘’라고 적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묘비 옆에는 우리말로 적은 국역비가 있다. 밑에는 대곡 성운이 지은 원래의 묘비를 포함해 세 개의 비석이 한국전쟁의 총탄 자국도 품은 채 한쪽에 있다. 그 아래에는 두 번째 부인 송씨 묘가 있다.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후학이 세운 덕천서원

선생 묘에 인사를 올린 뒤 10여 분 거리에 있는 덕천서원(德川書院)으로 향했다. 남명선생을 기리기 위해 세운 후학이 세운 덕천서원 앞 홍살문 옆에는 수령 45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햇살에 샤워중이다. 서원 출입구는 신(神)이 출입하는 가운데를 중심으로 좌우에 하나씩 문이 있는 ‘삼문(三門)’이다. 오른쪽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나온다는 ‘동입서출(東入西出)’에 따라 오른쪽으로 들어섰다.
덕천서원에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의 경의당이 보인다. 경의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의당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린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배롱나무 뒤편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의 경의당이 보인다. 경의당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유생들이 기거하는 동재와 서재가 있다. 경의당 중앙에 대청이 있고 양쪽으로 툇마루와 난간이 달린 2개의 작은 방이 있다.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선생과 수제자인 수우당 위패가 모셔진 숭덕사

경의당 뒤쪽의 신문(神門)을 지나면 정면 3칸, 측면 1칸 규모에 맞배지붕집인 사당인 숭덕사(崇德祠)가 나온다. 숭덕사 지붕은 바다 해(海)가 새겨진 기와들이 햇살이 빛난다.
‘북명에 물고기가 있었다. 이름은 곤이다. 곤은 크기가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이 물고기가 변해 새가 되었는데 새의 이름은 붕이다. 붕의 등 넓이도 몇 천 리에 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붕이 힘차게 날아오르면 그 날개는 마치 하늘을 가득 뒤덮은 구름 같다. 이 새는 바다 기운을 타고 남명으로 옮아가려 한다. 남명은 바다이다.’ <장자(莊子)> ‘소요유’(逍遙遊) 편에 나오는 구절에서 조식은 ‘남명’이란 호를 지었다. 당시 유학자들이 배척했던 장자지만 남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백성만을 위한 나라를 꿈꾼 자유로웠던 삶을 살았던 남명의 철학이 깃들어 있다.
사당 가운데에는 선생의 위패가 있고 오른쪽에 수제자인 수우당 최영경(崔永慶)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사당을 나오는데 들어갈 때는 몰랐던 내 무릎 크기의 두 개의 돌이 보인다. 아주 공손하게 허리 숙여 인사하는 모양새다.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덕천서원 길 건너 덕천강가의 세심정(洗心亭)

서원을 나와 길 건너에 있는 세심정(洗心亭)에 올랐다. 정자 옆에는 거창 포연에서 목욕하며 지은 시 ‘욕천(浴川)’이 새겨져 있다.
‘온몸에 쌓인 40년간의 허물/천 섬 맑은 물에 모두 씻어 버렸네/만약 티끌이 하나라도 내 오장에 생긴다면/바로 배를 갈라 흐르는 물에 뿌리리.’
칼 찬 선비의 바람이 머물고 그 숨결 따라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되돌아보는 소중한 깨달음이 있다.

 

50033458a2768bbf9d3a7bef98fbfa67_1487744 

글쓴이  해찬솔 김종신씨는 산청군 SNS기자단원으로 현재 성심원에 근무하고 있습니다.
블로그: 해찬솔 일기 (
http://blog.daum.net/haechansol71) 

 


hi
이전글  다음글  목록 글쓰기
정치
자치행정
선비학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