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당정치로 희생당한 남명 고제(高弟) 수우당 최영경

산청시대 2021-07-30 (금) 01:06 2년전 1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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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 옥종면에 있는 수정당(하동군청 누리집)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수정당’(守正堂)이 있다. ‘수정당’은 수우당 최영경(守愚堂 崔永慶)을 주벽主壁으로 모시고 석정 정홍조(石亭 鄭弘祚)공을 배향한 사당이다.
수우당은 선조 6년(1573) 5현사(五賢士)(이지함, 최영경, 정인홍, 조목, 김천일)의 한 사람으로 발탁되어 주부主簿, 수령守令, 도사都事, 장원掌苑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퇴하고, 남명선생을 사모하여 1575년 선대의 전장田莊이 있고 아우 최여경(崔餘慶)의 처가가 있는 진주로 가서 그곳 도동에 ‘수우당’(守愚堂)을 만죽산萬竹山 대나무밭 가운데 짓고 은거하였다. 수우당 주위로 국화 몇 떨기와 매화 몇 그루, 연꽃 몇 줄기를 심어놓고, 한 마리 학을 길렀다. 이 속에 노닐고 책을 읽으며 조용히 살고자 했다.

소재 노수신(?齋 盧守愼)(1515~1590)이 ‘자기 뜻을 고집하면 해가 클 것’이라며 여러 번 편지를 보내 만류하였으나 ‘벼슬길에 나아가는 해 역시 적지 않다’며 자신의 뜻을 관철시켰다. 이는 내암 정인홍이 율곡 이이가 말렸으나 듣지 않았던 것과 흡사하다. 내암이나 수우당은 자신이 세상을 바로잡으려는 뜻을 이룰 수 없음을 알고 물러나 있었지만 결국 화를 입고 말았으니 세상일은 뜻대로 되지 않음을 일겠다.

다시 지평에 제수되자 다음과 같이 사퇴하는 소를 올렸다.
지금 국시國是는 정해지지 않고 공론公論은 행해지지 않으며 붕당의 악풍이 일어나 기강이 날로 떨어져 갑니다. 이는 실로 소장안위消長安危의 시기입니다. 이에 촛불을 밝히고 위엄으로 진무鎭撫하여 편당의 무리로 하여금 그 가슴 속의 흉계를 펴지 못하게 하고 시류가 추향趨向하는 것을 바르게 하며 기강을 떨쳐야 할 것인데, 그 책임은 대신臺臣에 있습니다. 이때를 당하여 비록 고인으로 하여금 다스리게 할지라도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신같이 우둔하고 무식한 사람이 어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정우락 <최영경 삶의 특징과 그 문학의 미적 체계> 최영경 사지평소(辭持平疏) 재인용)

<맹자> ‘진심장’(盡心章)에 ‘고지인이 득지하얀 택가어민하고 부득지하얀 수신현어세하니 궁즉독선기신하고 달즉겸선천하니라’(古之人 得志 澤加於民 不得志 修身見於世 窮則獨善其身 達則兼善天下 옛사람은 뜻을 얻으면 은택이 백성에게 가해지고, 뜻을 얻지 못하면 몸을 닦아 세상에 드러냈으니, 궁하면 그 몸을 홀로 선하게 하고, 영달하면 천하를 겸하여 선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출처의식’이란 시대를 예리하게 관찰하여 그 마땅함과 그렇지 못함을 자각한 후 세상에 나아가서 자신이 온축한 바대로 경륜을 펴거나 혹은 물러나서 그 본성을 닦는 것을 말한다. (정우락 <전게서>) 그러나 시운은 어쩔 수 없는가?

수우당은 진주의 산림 처사로서 조야에 중망이 있는 남명선생의 고제高弟였다. 이이가 처음으로 조정에 출사하였을 때 사람들이 모두 성현이 다시 나타났다 하였으나, 최영경은 홀로 그렇지 않다고 하여 이이의 문도들에게 미움을 산 바 있다. 그러나 이이 자신은 최영경을 청개淸介하며 의義를 중시하는 인물로 평가하였다. 이처럼 최영경은 붕당과는 거리를 두고 있었지만, 이후의 붕당정치 과정에서 희생을 당한 인물이다. (김강식 <선조 연간 최영경의 옥사와 정치사적 의미>)

특히 붕당정치 성립 시기에 서인의 대표적인 인물이었던 정철 및 성혼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구체적으로 최영경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죽게 된 것은 서인 정철 때문이었다. 정철이 양천경 등을 사주하여 최영경을 길삼봉吉三峯으로 옥사에 얽어 넣었기 때문이다. 기축옥사의 전개 과정에서 정여립과 함께 역모를 주도하였던 인물로 길삼봉이 부각되었다. 이때 여러 적당이 길삼봉의 용모에 대해서 공초供招하는데, 각각의 진술 내용이 모두 달라 종잡을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길삼봉이 사실 당시의 실존 인물이 아니라 꾸며낸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김강식 <전게서>)

결국, 정철은 양천경, 강해 등을 사주하여 최영경을 길삼봉으로 얽어 넣었다. 이렇게 날조된 ‘삼봉이 곧 영경이다’는 설은 ‘정여립의 처족으로 평소 정여립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김구 유생 김극관에 의해서 제원 찰방 조기에게 전해졌고, 조기는 다시 감사 홍여순에게 알렸다. 이에 홍여순이 한편으로는 장계를 올리고, 한편으로는 경상우병사 양사형에게 편지해서 최영경을 잡아들였다. 그러나 최영경을 추궁해도 모반의 흔적이 나타나지 않았고, 또 최영경이 삼봉이라는 설도 근거가 없는 말이었음이 판명되어 결국 석방이 허용되었다.

그런데 간원諫院에서 최영경이 정여립과 상종했다고 주장하면서 최영경을 다시 추궁할 것을 청하였다. 선조가 “그 말을 누구한테서 들었느냐?”고 물으니 정언正言 구성이 대답하기를 “경상도사 허흔이 감사 김수한테서 들은 말”이라 했으므로 재차 투옥되었다. 재국에서도 최영경이 정여립과의 상종설을 부인함으로 허흔을 잡아다 물으니, 허흔은 김수에게 들었다 했고, 김수는 강경희에게서 들었다 했으며, 강경희는 진주판관 홍정서에게서 들었다 했고, 홍정서는 진주 품관 정홍조에게서 들었다 하였다. 이에 정홍조를 불러다 문초하였지만 끝내 불복하였다. (김강식의 <전게서>)

정홍조는 지위가 높다거나 빼어난 선비는 아니다. 그저 평범한 한 지식인일 따름이다. 수우당을 길삼봉으로 몰아 죽이기 위해서 정홍조에게 들은 것으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았지만, 석정 정홍조는 의인이었다. 권세에 간교하게 영합하여 고관대작을 지낸 선비인 양 가식하던 사람들과 어찌 비교할 수 있겠는가? 석정공은 서울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홍정서는 여러 번 회유하고 위협하기도 했다.

그러나 석정공의 공사供辭는 이러했다. “최공은 바른 선비요, 내가 평생 태산북두泰山北斗처럼 우러러보는 분으로, 그 문하에 출입하지 못한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오. 내가 평생 지켜온 바는 정직이요. 나는 사십 리 밖에 살아 최공의 일은 모르고, 홍정서에게 말한 적도 없소. 내가 거짓말을 해서 살아난다면, 세상 사람들이 반드시 ‘저자는 훌륭한 수우당을 억울하게 죽게 한 자이다.’라고 매도할 것이니, 장차 내 자손을 어디에 두겠소”라고 바른말을 하였다. 또 “내 죽어 의귀義鬼가 되어 구원九原에서 상종할지언정, 불의不義한 사람으로 살아 만세공론萬世公論에 죄를 얻을 수는 없소 성명聖明께서는 통찰하시어 최영경의 원통함을 풀어주소서.”라고 밝혔다. (허권수 ‘존덕사 숭모비명’)

1612(광해4)년에 진사 하징과 300여 명의 상소로 수우당이 덕천서원에 배향되었으나, 1870년 불행히도 덕천서원이 훼철되었다. 다시 유림의 공론이 크게 일어 1918년 경의당 중건, 1927년 숭덕사를 중건하고 남명선생을 봉안, 3월과 9월 초정初丁에 향사를 올리게 되었지만, 수우당의 배향은 2013년에야 이루어졌다.

덕천서원이 훼철된 후, 진주 북평면(현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에서는 이곳에 세거하던 석정공의 후손 석기奭基, 영훈英壎, 섭기攝基 등 제공이 수우당과 석정을 향사하기 위한 협의를 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수우당을 적극 변무하여 신원하게 하고 영우嶺右의 사림을 구원한 사실에 근거하여 모든 집안의 의견을 모으고, 유림과 합의를 보았다. 1916년에 영건임원營建任員을 구성하고, 1917년 공사를 시작, 1918년에 수우당을 주향으로 석정공을 배향으로 봉안하고 매년 춘 3월 중정中丁에 향례를 올리기로 하였다.

존덕사 상량문은 회당 장석영(晦堂 張錫英), 수정당 상량문은 회봉 하겸진(晦鋒 河謙鎭), 당의 기문은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이 각각 찬하였다. 사명祠名은 존덕사(尊德祠)라하니, 존덕수정(尊德守正)이라한 상향문(常享文)의 뜻에 연유했다. 덕원서당(德源書堂)은 석정공을 기리고 문중의 강학하는 공간을 삼기 위해 1946년에 유계를 모으고 1962년에 완공하여 9월 28일 석정공을 제향한다. 덕원이라는 당명은 ‘남명선생의 도학 근원이 덕천강을 따라 이곳에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석정 정홍조(石亭 鄭弘祖 1546?~1619?) 공은 고려 통례문지후 정선(通禮門祗候 鄭人先)을 시조로 본관은 진주(晉州)이다. 자는 사응(士膺), 호가 석정(石亭)이다. 진주 진성리에서 살았다. 고조는 내금위사정內禁衛司正을 지낸 정효성(鄭孝誠)이고, 증조는 부호군증남원도호부사副護軍贈南原都護府使를 지낸 정장손(鄭長孫)이다. 조부는 장연현감長淵縣監을 지낸 정세창(鄭世昌)인데, 슬하에 아들 8형제를 두었다. 큰아들은 생원 정인평(鄭仁平)이고 호는 낙진헌(樂眞軒)이며, 공의 양부養父이다. 둘째 아들은 만호萬戶를 지낸 정순평(鄭順平)으로 공의 생부이다. 공의 어머니는 진주 강씨 강응태(姜應台)(1495~1552)의 따님이다.

공의 부인은 홍문교리 주박(1524~1588)의 딸이며, 문민공 신재 주세붕(1495~1554) 선생의 손녀이다. 2남 3녀를 두었다. 큰아들 정준鄭濬(1589~?)은 황암篁巖 박제인(朴齊仁, 1536~1618)을 스승으로 모셨고, 정준의 아내는 함안 조씨 부사 조영혼(趙英混)의 딸이며 대소헌大笑軒 조종도(趙宗道, 1537~1597)의 손녀이다. 석정공의 작은아들 정렴(鄭濂)은 효행으로 증 사헌부감찰이다. (이 자료는 2018년 10월 28일 ‘수정당 영건 100주년 기념 학술 세미나’ 자료를 참조했다.)
이로써 명망 있는 집안이며 꼿꼿한 선비의 집안임을 알겠다. 또한, 유풍을 지켜나갈 표준이 될만한 집안임을 알았다. 민족 국가나 가정 개인이 확고하게 문화나 전통 가풍을 지키려는 의지가 없으면 무너지고 만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명심해야 할 일 아니겠는가?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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