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군사사직’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났던 곽재우 장군

산청시대 2021-08-13 (금) 00:56 2개월전 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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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정 전경

삼가에서 곧바로 의령으로 향했다. 들판에는 양파를 수확해서 쌓아놓은 모습이 군데군데 보이고, 왼편으로 멀리 자굴산이 보인다. 읍내에 못 미쳐 오른편 들 가운데 큰 현대식 건물이 보인다. 활을 쏘는 사정射亭 홍의정紅衣亭이다. 홍의장군紅衣將軍에서 유래한 이름이겠다. 망우당 곽재우 장군을 기념하고, 상무尙武하는 뜻이 드러난다. 홍의정에 들어서니, 큰 돌에 ‘반구저기’(反求諸己)라고 쓰여 있다. 화살이 과녁에 적중하지 못하거든 ‘돌이켜서 자신에게 반성하라’는 뜻이다. 옛사람은 늘 ‘반구저기’의 마음으로 일이 잘못되는 것을 스스로 반성하고 면려했던 것을 알 수 있겠다.

충익사 관람은 뒤로 미루고, 정암진으로 향했다. 최근에 함안에서 남강을 건너 의령으로 들어오는 국도 위에 ‘의령 관문’을 세워 놓았다. 관문 옆에는 높은 석대 위에 장군의 기마상이 서 있다. 남강과 먼 들판을 굽어보는 장군의 눈빛이 형형하다. 관문의 안쪽 벽에는 장군이 공부하던 명경대의 보리사가 그려져 있다. 금천과 명경대를 찾아 자굴산을 헤매던 일이 생각난다. 곽 장군이 공부하던 곳이 보리사(菩提寺)라면, 선생의 명경대가 있는 산사가 보리사일 것이며, 그 제자가 37년 후에 거기서 공부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겠다.
아래로 남강을 굽어보니 ‘정암’(鼎巖)은 예대로 있고 강물은 말없이 흐른다. 옛 전쟁터, 비옥한 들판의 비닐하우스 안에는 수박이 익고 있을 것이다.

장군은 헌걸찬 장부였다. 마음속 결정을 내리면 매진하는 지사였다. 망우당에 관한 기록은 정사<조선왕조실록>뿐만 아니라, <망우당 전서>, 여러 문집류, 민간설화가 많다. 열여섯에 산천재로 남명선생을 찾아뵈었는데, 병법을 가르쳤다든지, 외손서를 보기 위해 여러 후보자를 모아놓고 소태국을 끓여 먹게 하자, 모두 먹지 못했는데 망우당은 그 쓰디쓴 소태국을 다 먹었기 때문에 합격하여 외손서가 되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망우당의 범상치 않음을 부각하려는 말일 것이다.

1592년 4월 14일 왜적이 상륙했다는 소식을 듣고 수령 방백이 도망할 때, 불과 8일 후인 4월 22일 기병했다는 것은 그 준비하고 착수하는 민첩함을 알 수 있다. 붉은 전포를 입고 백마를 타고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는 깃발을 들었다. ‘그 붉은 색은 망우당 부인의 월경대月經帶로 지었다. 강한 음기는 강한 양기를 막는 것이어서 능히 총알을 막았다’는 등.

장군은 전설 같은 일을 해내었고, 전쟁 후에도 50여 차례 벼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창암강사 巖江舍(망우정忘憂亭)을 지어놓고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망우정은 여현정(與賢亭)이라고도 한다. 임종 때 외손서인 제자 이도순(1585~1625)에게 양여했기 때문이다. 장군은 창의할 때 가산을 처분하여 전비에 썼고, 자형 허언심(1542~?)의 노비 수백 명이 종군했고, 양곡 수천석을 군량미로 썼다. 마침내 솔잎을 먹으며 강사에서 여생을 마치고, 유언에 “당우唐虞는 천하를 현인에게 주었고 나는 강사를 현자에게 준다. 주는 것의 대소는 그 다르기가 천양의 차이라고 하더라도 그 주는 뜻은 요순과 내가 한가지다. 이후로 대대로 현자를 얻어 전하도록 하라”고 했다. 생전에 내가 낙동강 상에 있어서 ‘왜적들이 범접하지 못하게 하리라’하기도 했다고 한다.

나이 66세, 1617년 4월 10일 강사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날 정오에 번개가 치고 소낙비가 내렸으며 붉은 기운이 하늘을 치솟는 순간 갑자기 운명하니 사람들이 모두 이상히 여겼다(연보).’ 또한 부사 성여신(1546~1632)이 두류산에 유람하려고,

진주 목사 이삼성과 몇몇 고을 사람을 따라 걸어서 주(州. 진주를 말함)의 서쪽 광탄(廣灘. 너우니 <필자 주>)에 도착하니, 검은 구름 한 덩어리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움직이더니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며 천둥이 치고 번개가 번쩍거렸다. 그러나 모자를 벗을 여가도 없고 도롱이를 펼 겨를도 없이 삽시간에 날은 개이고 긴 무지개가 하늘에 뻗어 자색 기운이 동북간에 어려 있었다. 동행하던 사람들이 서로 돌아보며 이상하게 여겼다. 나도 이것은 실로 심상치 않은 변괴라고 여겼다. 마음속으로 이상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생각했다. 11일간을 유람하고 돌아와 함께 박민(1566~1630)의 침류정枕流亭에 이르러, …갑작스레 관찰사 망우당의 부음을 듣고 헤어졌다. 날짜를 헤아려보니 광탄 위에 우레가 치던 순간이 바로 망우당이 세상을 떠난 시간이었다. 아! 공은 의리에 의하여 의병을 일으켰으며, …미묘한 뜻이 있는 곳에 이르러서야 어찌 보통 사람들이 가히 끝을 헤아릴 수 있는 바이겠는가?(부사 성여신의 기사에서. <망우당 문집> 재인용) 연보와 부사의 기록이 신통하게 같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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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우정과 여현정 현판

의령 땅에서 망우당의 유적과 산·들·강을 바라보며 말을 달렸던 한 대장부를 생각한다. 부귀공명을 티끌처럼 보고 나라가 망하려 할 때를 당하여, 선생에게 배운바 ‘국군사사직’(國君死社稷, 임금은 나라를 죽을 각오로 지킨다)의 정신으로 분연히 일어났던 영웅, 공훈을 나라가 갚으려 했으나 할 일 다 하고 홀연히 자취를 감춘 늠름한 호걸, 그 어른을 생각하며 귀로에 올랐다.

詠懷(영회) 감회를 읊다
昔日駒馳萬死身(석일구치만사신) 지난날 왜적 토벌로 만 번 죽었을 이내 몸이,
如今無事一閒人(여금무사일한인) 지금토록 무사하여 한가로운 사람이네.
簞空無惱休糧粒(단공무뇌휴양립) 곡식 음식 안 먹으니 대그릇 비어도 걱정 없고,
年老忘憂絶世塵(년노망우절세진) 세상 티끌 끊었으니 나이 들어도 근심 잊겠네.

장군은 분연히 일어나서 왜적을 무찔렀고, 공직에도 나가면 그 직을 충실히 수행했지만 마음에 맞지 않으면 돌아와 세상과 인연을 끊고 신선이 되고자 했다. 부유했던 재산은 전쟁 비용으로 다 썼고, 자질의 옷을 벗겨 병사들을 입혔으니 부귀와 영화는 당초에 바라는 것이 아니었다. 돌아가실 때는 무지개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말이 어찌 한갓 세상의 뜬 설화로 치부할 것이랴.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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