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1) 천광 운영이 내성천에 어리고

산청시대 2021-09-06 (월) 00:22 1개월전 496  
약포 정탁의 도정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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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서원 전경(예천군 누리집)

어느 날 최석기 교수가 대학생 스무 명 정도를 데리고 산천재에 왔다. 최 선생이 학생들에게 해설을 한다.
“산천재는 옛날 ‘서울 대학교’입니다. 전국의 박사급 학생들이 이 궁벽한 산중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이런 산중이 온 나라 학문의 중심이 되었던 일은 아직 없었습니다.”

흔히 ‘강우학파’(江右學派)라고 하는데 강우 지역은 물론이고 서울의 기라성綺羅星 같은 학자들이 남명선생을 찾아왔다. 송인(宋寅, 1517~1584), 최력(崔?;, 1522~?), 최황(崔滉, 1529~1603), 박순(朴淳, 1523~1589), 이양원(李陽元, 1526~1592), 이요(李瑤, 1537~?), 김효원(金孝元, 1532~1590) 등의 제자들이 급문해 왔다. 아마도 서울에서 선생의 명성을 듣고 오고자 했지만 못 오는 사람은 그 얼마였겠는가? 

남명선생이 1566(명종21)년 10월 3일 임금을 입대하고, 11일 사임하고 돌아왔는데, 그때의 상황을 연보에 이렇게 기록했다. 
‘당시 조정에 가득했던 사대부들이 서봉瑞鳳(상서로운 봉황)과 경성景星(상서로운 별)을 본 듯이 다투어 와서 인사를 드리고 학문에 관해 묻고 의문을 질문했다. 11일에 사임하고 돌아오면서 한강을 건너는데, 전송하는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배 두 척에 가득했다.’ 
이때 여러 가지 편의를 돌보고 주선했던 제자가 자강子强(오건), 자정子精(정탁)이었다.

약포 정탁도 남명선생을 한번 뵙고 배움을 청하고 싶었다가, 1561년 선생이 덕산에 산천재를 지은 그해 진주 교수로 발령이 나, 와서 배웠다. 
약포(鄭琢, 1526~1605)는 예천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생을 마쳤다. 그의 선대는 본래 안동 사람이고 청주 정씨다. 예천에 세거하게 된 것은 그의 부친 정이충鄭以忠이 금당곡의 평산 한씨 한종걸의 딸에게 장가갔기 때문이다. 그는 외가에서 탄생하여 10세까지 살았고, 11세부터 안동의 가구촌에 10년 동안 살다가 20세에 다시 금당실로 돌아갔다. 22세 되던 해에 예천의 고평에 터를 잡고 거제 반씨 반충의 딸에게 장가듦으로 이곳에 터를 잡는다. 33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게 된다.

약포가 67세이던 해에 임진왜란이 발발, 약포는 우찬성 겸 내의원 부제조로 선조임금을 호종, 7년 동안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다. 이들은 임진강 방어 전투가 또다시 실패하자 평양을 버리고 … 최종 목적지는 의주였다. 평양성을 버리려는 국왕을 붙잡고 약포는 눈물로 호소한다.
‘6월 10을 무술, 정원政院에 나가 평양에 머물기를 청하다. 계啓하여 말하길 ‘국운이 불행하여 왜적이 힘을 믿고 침범하니 임금님의 수레가 피난을 위해 서쪽으로 거동하였습니다. 겨우 한 모퉁이의 땅을 보존하고 있으니 신은 슬퍼 통곡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서울을 지키지 못한 것은 이미 지난 일이니 어쩔 수 없습니다만, 다행히 평양은 성곽이 조잡하나마 완전하고 백성들이 많으며 창고와 식량이 지탱할 만합니다. 대동강은 이른바 큰 강을 낀 천연의 요새이고 인민들은 거동을 멈추기 위해 힘쓰고 있으며, 모두 적개심을 품은 채 남녀노소가 모두 나서서 성을 지키고 있으니, …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반드시 출발을 멈추기로 결단하여 주십시오’(<용사잡록>(龍蛇雜錄) 정탁) (김낙진, <약포 정탁의 생애>)

또한, 약포는 곽재우, 오건, 김덕령, 이순신 등을 추천했고, 그들을 구명하기 위해 애썼다. 광해군 분조分朝를 따라다니며 의병을 모집하는 일, 명나라 군대와의 협의, 식량 조달 등 모든 일에 차질이 없었다. 선조가 “너의 스승 조식은 어떤 사람인가”하고 묻자, “예, 저는 스승으로부터 소를 한 마리 탔습니다. 공직에 오래 있어도 큰 하자가 없는 것은 소를 타고 다닌 덕택입니다”고 하였다 한다.

‘남명과 약포의 만남은 약포가 진주 교수로 부임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 당시 남명은 지리산 자락에 산천재를 건립하여 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처음 그는 직업의식이 발동하여 남명의 교수법을 배워 답습하려는 생각을 가졌다. 조정에 널리 알려질 정도의 명망을 얻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이 한결같이 존경하고 따르는 비결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 향촌 자제의 교육에 활용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약포는 남명을 만난 순간 그 같은 단순한 생각을 버려야 했다. 천 길 낭떠러지와 같은 꼿꼿하고 엄숙한 그의 외형적 기상에도 불구하고 그 내면에는 사람의 마음을 감화시키고 끌어들이는 푸근한 인간미가 흐르고 있었다. 자신이 미처 생각하지 못했고 성취하지도 못한 포용력을 그는 발견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그는 자신이 사람을 가르칠 단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는 스스로 제자가 되어 내면에 숨겨진 진정한 인품을 찾아내는 방법을 배우리라 결심했다.… 불의를 보면 정면대응을 하는 원칙론을 고수하면서도 사소한 잘못은 감싸 수용해주는 후덕함을 겸비한 그의 복합적 면모는 이러한 과정에서 정립된 것이다. 그가 남명을 찾아 배운 요체가 바로 이것이었다. … 약포는 선조 28년(1595) 70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임명되어 정승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그는 세 차례에 걸쳐 왕에게 사직 상소를 올렸다. 전란이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 칠순의 나이에 접어든 자신은 역할을 수행하기가 어렵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그는 다시 좌의정에 제수되었다. 그는 한사코 사양하여 사직을 허락해 줄 것을 청했다. 그럼에도 왕은 오히려 그를 판령중추부사(判?領中樞府事)로 임명하여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 그에 대한 왕의 애정의 정도를 실감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는 왕의 호의를 뒤로하고 낙향했다.… 결국, 그는 선조 38년(1605) 조용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 뒤에 그는 위성공신衛聖功臣 1등에 녹훈됨과 동시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정간貞簡의 시호를 받았다.(‘벽립천인에서 관용의 이치를 터득한 정승 약포 정탁’ 설석규 <선비문화>9호, 2006)

1997년 도정서원道正書院이 복원되었다. 복원을 알리는 통문이 덕천서원으로 왔는데 퇴계선생 제자라는 말만 있지, 남명선생에게 배웠다는 말은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 답통문을 보낼 때, ‘소 가져간 것을 내어놓아라’고 했더니 미안하다는 편지가 온 일이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 유림사회의 인식이 아직도 이렇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월은 흘러 2001년 8월 10일, 이날은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 행사가 열리는 날이다. 6월 26일이 첫 ‘남명선생 탄신 추모제’가 열린 양력 8월 10일이었기에 양력 8월 10일에 추모제 행사가 열렸고, 500주년 행사도 이날 열린 것이다. 그날 예천에서 약포의 후손 다섯 분이 왔다. 전날인 8월 9일,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는데 퇴계 후손도 다섯 분이 왔다. 도산서원에서는 안동 유림 500명, 퇴계 후손 500명 천명의 이름이 적힌 파록爬錄을 두루마리로 작성해서 축하의 뜻을 표한 것이다. 그때 한 일간지에서 ‘남명 퇴계 두 학파 500년의 화해’라고 문화면에 크게 쓴 기사가 기억이 난다.

남명선생은 6월 26일 퇴계선생은 11월 25일 탄생이라서 같은 해 겨울 도산서원으로 우리도 7명이 도산으로 갔다. 물론 우리도 원생과 후손을 적은 파록을 만들어서, 도산서원으로 바로 가서 사당에 첨알하고 전교당에서 인사를 나눈 후 종택을 방문 종손에게 인사드리고 온계리의 열화당悅和堂에서 숙박을 했다. 다음날 안동 천변에서 도운회陶雲會(퇴계선생 문인들의 후손 모임) 주최로 퇴계선생 오백주년 고유제가 열렸다. 
다시 2019년 기해 3월 19일, ‘산청 두류 한시회’에서 도정서원을 찾았다. 도정서원은 예천군 호명면 내성천을 굽어보는 산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입덕루入德樓에 올라 의관을 갖춘 다음 상현사尙賢祠에 고유를 올렸다. 그날 나는 아래와 같이 칠언율시를 지었다.

추모 약포 정 선생(追慕藥圃鄭先生)

효계행로주천동(曉鷄行路晝泉東) 새벽닭 울 때 길을 나서서 낮엔 예천 동쪽인데,
심소연원입덕동(尋遡淵源入德同) 연원을 거슬러 찾으니 입덕이 같구나.
당일은근선철훈(當日慇懃先哲訓) 그때 은근한 선사의 가르침을,
종신복념후수공(終身服念後垂功) 종신토록 가슴에 품어 훗날 공을 세웠네.
내성완구어주자(乃城玩鷗魚舟子) 내성천에 갈매기 벗 삼아 고기 잡는 사람은,
북궐기우치국옹(北闕騎牛治國翁) 북궐에서 소를 타고 나라 다스리던 어른이었구나.
행견현손는긍구(幸見賢孫能肯構) 다행히 어진 자손 즐겁게 집을 지었으니,
운잉자시여무궁(雲仍自是與無窮) 후손이어, 이로부터 더불어 무궁 합시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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