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2) 덕암·복암·현재‥남명선생 가계, 그리고 그 후예들

산청시대 2021-09-16 (목) 23:32 2년전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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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암이 창작한 신명사도

남명선생의 창녕昌寧으로 시조는 휘 계룡繼龍이다. 태사공太師公이라 부르는데 왜적을 토벌한 공으로 신라 진평왕의 사위가 되었다. 고려 때는 9세로 평장사平章事를 지냈고, 고려 태조 시에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낸 휘 서諱瑞의 어머니는 고려 태조비 신덕왕후 소생인 덕궁공주德宮公主이다. 여러 자료를 조사해 보건대, 아마도 고려말까지는 개성에서 벼슬살이하다가 조선 초에 삼가로 내려온 것으로 짐작된다. 

 

증조부는 생원生員 휘 안습安習인데 그 부인은 강성문씨江城文氏 충선공 문익점忠宣公 文益漸의 동생 익하益夏의 손녀이다. 할아버지는 휘 영永으로 임천조씨林川趙氏 지족당 조지서知足堂 趙之瑞의 누님에게 장가들었다. 아버지 휘 언형彦亨이 문과 장원으로 벼슬에 올라 승문원 판교 承文院 判校를 지냈다. 어머니는 숙부인 인천이씨로 집의執義 찬瓚의 따님이고, 어머니의 외조부는 좌의정을 지낸 최윤덕崔潤德이다. 숙부 언형彦亨도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 좌랑에 올랐지만, 기묘사화에 화를 입었다. 동기간은 7남 4녀로 11남매이다. 

 

‘아들 일곱을 두었는데 모두 일찍 죽고, 나와 막내 환桓만이 다행히 죽지 않았다. 딸이 넷인데 사위는 정운鄭雲·이공량李公亮·정백빙鄭白氷·정사현鄭師賢이다.’(조식 ‘선고 통훈대부 승문원 판교 묘갈명’) 이렇게 선생의 선고 묘갈명에 기록되어 있으나, 족보에는 이삼李參이라는 사위가 한 사람 더 있다. 

 

정경부인 남평조씨는 아들 한 분과 딸 한 분을 낳았는데, 아들 차산次山은 9세에 요절했고 딸은 두 딸을 두었는데 동강 김우옹과 망우당 곽재우가 그 사위이다. 숙부인淑夫人 은진송씨 소생은 삼남 일녀인데, 차석次石, 차마次磨는 현감이고 차정次?은 만호, 사위는 함안인 군수 조신도趙信道이다. 그 후로 혹은 벼슬을 살기도 하고 생원 진사로 가문의 명맥을 이어 오다가 다음과 같이 정조임금의 특전이 있었다.

 

‘임금이 전교하기를, …문정공 조식은 규모와 기상이 나약한 사람으로 하여금 뜻을 세우게 하고, 완악한 사람으로 하여금 청렴하게 할 만하니, 심오한 경지에 나아가고 지킨 바가 탁월하다. 오늘날과 같이 풍속이 시들하고 퇴폐한 시대에 어찌 문정공 같은 사람을 얻어 시대 풍조를 바꿀 수 있는 일을 맡길 수 있을까? …문정공 조식의 집안에, 관리를 보내 써서 내린 제문을 가지고 가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라.’(‘정조실록’ 정조20년 1796. 8월 13일)

‘…영남의 고 유신儒臣 조위曺偉, 조식曺植, 정구鄭逑, 장현광張顯光과 호서의 유신 유계?棨, 윤황尹煌, 김경여金慶餘, 김홍욱金弘郁과 호남의 유신 박상朴祥, 기대승奇大升 및 고 충신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의 후손을 각각 그 도의 관원으로 하여금 조사해 아뢰도록 하라. 이들은 문득 생각이 나서 말한 것이다. 오늘 하교에 들어있지 않으나, 고가故家, 세족世族의 후예로서 천거할 만한 자가 있으면 일체 천거하라.(‘정조실록’ 정조21년 1797년. 12월 20일) 

 

‘임금이 전교하기를, 고 유신 정구, 조위, 장현광의 후손에 대해서는 이번 정사에서 낙점했다. 그런데 고 유신 조식의 후손 조용완曺龍琓만 들지 못하였다. 처음에는 참하관參下官 자리를 하나 마련하여 벼슬을 준 뒤, 점차 승진시켜…’(‘정조실록’, 정조22년 1798년 10월 12일)

 

이로써 조용완(자 백옥伯玉 호 덕암德巖1763~1832)은 정릉 참봉으로부터 용궁 현감에 이르렀다. 정조임금 때에 이르러 제관을 보내 남명선생을 치제하고(1796), 번암 채제공(樊巖 蔡濟恭, 1720~1799)이 판서 시부터 영의정 때까지 15년 간이나 원장을 맡아보았다. 게다가 후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덕천서원은 창건 때에 못지않은 영화를 누리게 된 것이다. 이에 덕암공에게 벼슬을 주어 불천위不遷位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가까운 남사의 전 장령 이지용(李志容, 자 자옥子玉 호 남고南皐 1753~1831)과 뜻을 맞추어 1818년에 산천재를 복원했다. 실로 216년 만의 일이다. 

 

‘서재가 완공된 후 7년 갑신년(1824)에 고을 인사들이 모두 서재에 모여 경하하면서 낙성하고 향음례를 행하였다. …불행히도 임진년 난리에 화재를 당하고 창상의 변화에 폐허가 되어 금일에 이르기까지 행인 과객들이 그 남은 터만 지적할 뿐이었다. …정축년(1817) 가을 본 손과 사림이 함께 도모하여 …무인년(1818) 3월에 공사를 마쳤으며, 갑신년(1824) 중하에 이르러 네 분 성현의 유상을 환수하여 봉안하였다.…’(남명학연구 제5집, 김경수, ‘산천재 임안서’)

‘정축년(1817) 가을 순영巡營에서 50석을 획급劃給하고 주목州牧에서 20석을 출조出租하고 그 역정役丁을 제공하고 이웃 관아도 또한 보조하고 사림과 본 손이 능력에 따라 재물을 출연하여 이 서재를 중건하였다.’(덕천서원지 479)

 

산천재 중건과 덕천서원 중수한 덕암 조용완

 

덕천서원의 원장院長, 원임院任은 진주목사 아니면 판서나 정승이 맡아 했기 때문에 현지 유림이 만나기는 어려웠던 것 같다. 남고 후손인 고 남주南洲 이기상李琦相씨의 말에 의하면, ‘처음 남고가 원장 및 재장으로 행공(行公 취임)할 때 유림과 후손이 길 양쪽에 두 줄로 서서 마중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덕암은 산천재의 중건을 주도했고 서원의 중수에도 노력했다. 

 

<덕천서원지>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진주목의 남명선생 덕천서원은 우리 선조대왕 9년(1576) 병자에 처음 건립되었는데 25년(1592) 임진에 이르러 왜적에게 소실되었다. 왜적이 물러가고 35년(1602) 임인에 다시 건립하였다가 뒤이어 중수한 것이 광해군 기유년(1609)과 숙종대왕 29년(1703) 계미이다. 계미년부터 지금까지 무릇 90여년이 지났으니 …산장山長인 번암樊巖 채상국蔡相國께서 진주목사 정재원(丁載遠, 1730~1792)과 고을 선비 하덕응河德應, 이필무李必茂 및 선생의 후손 용완龍琓에게 위탁하여 재목을 모우고 장인을 소집하여 예전 규모를 따라 새롭게 중수하고 병진년(1796) 중춘에 공사를 마쳤다.’(이가환李家煥, 1742~1801의 <중수기문>, 자는 정조廷藻 호는 금대錦帶,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종손이다.)

 

복암은 <신명사도명해> 지어 학자들 이해 도와 

 

덕암공의 후에 뛰어난 학자이면서 문중사업을 크게 한 후손은 복암 조원순(자 형칠衡七, 1850~1903)을 이야기 않을 수 없다. 남명선생 10세손으로 가학을 열심히 닦는 한편, 성재 허전(性齋 許傳, 1797~1886)과 한주 이진상(寒洲 李震相, 1818~1886)으로부터 성리학을 배웠다. 덕천서원이 훼철된 후 복원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복암의 주요업적으로는 <남명집> 중간본의 교정 간행, 내암의 요소가 있거나 노장으로 의심받는 부분의 교정, 특히 <신명사도 명해>(神明舍圖 銘解)를 지어 학자의 이해를 돕게 한 것 등이고, <남명집>의 의문점을 교유하던 선후배 학자들과 질의 토론했다. 

복암은 삼종제 필순泌淳과 학계學契를 맺어 소천서당小川書堂을 건립 추진하다가 못 이루고 5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그의 아들 현재 조용상曺庸相(자 이경彛卿 호 현재弦齋1870~1930)이 그의 사종질 재환再煥과 함께 1924년에 건축하고 3년 후에 낙성하였다. 1930년대 <남명집> 중간본의 간행소는 대포 한문서당으로 되어 있고, 발행인은 조표(1869~1939)이다. 

 

<중간남명선생문집발>重刊南冥先生文集跋은 용산 이만인(龍山 李晩寅, 1834~1897)이 갑오(1894)에, <남명선생편년서>南冥先生編年序는 영재 이건창(寧齋 李建昌, 1852~1898)이 정유년(1897)에 썼다. <남명집>은 내암 이래 몇 차례 개판을 거쳤지만 청산되지 않은 내암의 잔재와 오류를 근본적으로 시정 하고자 하는 논란이 일어 원집原集, 습유拾遺, 학기學記 등을 크게 손질하여 간행했고 이는 또다시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그러나 복암의 고충이 이해가 된다.

소천서당에도 두 궤짝의 고문서가 있는데, 역시 정신문화연구원에서 영인해 갔지만, 아직 ‘고문서 집성’이 간행되지 않았다. 최근에 남명학연구소에서 번역한 <한글 그레이트 북스052>는 10여종의 <남명집> 판본 가운데 완선된 판본을 선택 번역했다.(남명집 서문)

 

‘남명선생 묘지명’으로 남명 실체 표현한 현재

 

현재는 복암공의 아들이다. 복암공이 세상을 떠난 후 선생 사업을 계승했다. 노백헌 정재규(老栢軒 鄭載圭, 1843~1911)와 계남 최숙민(溪南 崔琡民, 1837~1905)에게 배웠다. 덕산비 복비사건(德山碑 ?碑事件)과 덕천서원 중건 후 배향문제, 파보 간행 등 어려운 여러 문제의 중심에 현재공이 있었다. 특히 ‘남명선생 묘지명’을 찬하는 일을 추진하였다.

 

‘… 남명같은 위대한 인물의 행적이나 학문을 단시일에 평가하여 짓게 하기가 어려우므로 장례 때 지석誌石을 묻지 못했다. 그 뒤 이왕 늦었으니 …문묘 종사를 기다려 묘지를 작성할 생각을 하였다. 후손 조용상曺庸相이 집안의 의견을 모아 당시의 대학자 면우 곽종석(?宇 郭鍾錫, 1846~1919)에게 묘지명을 요청하여 1912년에 완성하였다. …심재 조긍섭(深齋 曺兢燮, 1873~1933), 회봉 하겸진(晦峰 河謙鎭, 1870~1946)에게 보여 보완토록 했는데 심재는 상당 부분 의견을 개진하여 면우에게 고치게 했다.’(허권수, ‘남명선생 신도비와 후세 유림의 논란’)

 

이렇게 해서 1912년에야 남명선생 묘지명이 탄생하게 되었다. 흔히 남명선생을 잘 표현한 문자로 대곡 성운이 지은 ‘남명선생 묘갈명’(南冥先生 墓碣銘), 우암 송시열이 지은 ‘남명선생 신도비명’(南冥先生 神道碑銘), 면우 곽종석이 지은 ‘남명선생 묘지명’(南冥先生 墓誌銘)을 ‘3대 문자’로 친다.

 

이 세분 외에 허다한 동족 후손의 특기할 공로가 있지만 일일이 다 기록할 수 없음이 안타깝다. 마지막으로 선생 12대손인 조옥환 ‘남명학 진흥재단 이사장’의 선생 사업에 바친 정성을 한 줄로 기록하고 이분에 관해서는 너무 업적이 커서 별도로 한편의 글을 쓸 것이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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