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응현의 사계정사(沙溪精舍)와 횡탄문회계(橫灘文會계)

산청시대 2021-10-21 (목) 12:20 2년전 1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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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 방응현 묘비

사계정사는 2층 기단 위에 화강암 주춧돌을 놓고 원주를 세웠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목조 팔작 기와집을 지어 정 중앙에 방 한 간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둔 구조인 호남지방의 대표적 정사 양식이다. 전북 문화재 자료 16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사의 앞에는 공적비, 기적비가 늘어서 있는데,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에 독립운동을 한 후손들을 기리는 비석 군이다. 

 

그 옆으로 돌아가면 ‘유천서원 유허지’(楡川書院遺墟址)가 있다. 1839년(순조30) 지방 유림들이 창건했는데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고 지금은 유허지를 담장으로 둘러치고 담장 안은 무덤 같은 것이 몇 기가 있는데 그 안에 위패를 묻어 놓았다 한다. 방사량, 방귀온, 안탁, 방응현, 안창국 등 오현을 모셨던 서원이다. 그 담장 앞에 ‘오현서원 유허비’가 있다. 방씨와 안씨는 남원의 사족으로 향촌 사회의 업적이 두드러진 집안이었던 것 같다. 안씨는 지금은 30여호가 살고 있다는데 선대의 전장이나 선산 재각 등을 볼 때 대대로 들난 가문임을 알겠다. 

방응현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영천리의 사계천 위에서 시서와 농사로 일생을 보냈다. 할아버지는 호조좌랑을 지낸 방귀달房貴達이고 아버지는 방한걸房漢傑이다. 방원진은 손자인데 임진왜란 때는 16세의 나이로 양대박(梁大樸, 1544~1592)과 함께 의병을 일으켰으나 아버지의 상으로 중지하였다가, 정묘호란(1627) 때 1천여명의 의병과 군량을 모아 임실에 이르렀다가 강화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돌아왔고, 병자호란(1634) 때는 집안 동생들을 군관으로 삼아 의병을 일으켰으나, 청주에 이르렀을 때 화의가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듣고 돌아왔다. 

 

방응현은 평생을 농사와 과수 등 생리 문제에 관심을 두었고 동향 의병장 변사정(1529~1596)과도 친교가 두터웠다고 하는 것<남원지>으로 보아 남명학을 충실히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변사정 또한 일재 이항과 옥계 노진에게 수학한 것으로 보아 남명학파와 무관하다 할 수 없을 것이다. 동향의 사재당 안처순(1492~1534)이 기묘사화를 피하여 귀향한 것과 관련해 볼 때 방응현의 처사로 지낸 것이 이해된다.

 

방근동씨는 차를 몰고 섬진강 강가의 고아한 정자로 안내한다. ‘횡탄정’(橫灘亭)이다. 당시 담양의 소쇄원 시단 활동이 활발했던 것처럼 사계정사도 비견될 만큼 활발했다는 것을 알았다. 남원지방에는 또 다른 ‘광탄문회계’ 활동이 일어났다. 이 활동의 중심에 방응현이 있었다는 것에 관심이 간다. 사계의 교우나 나라가 어려울 때 그의 가문의 대응을 우리는 살펴보았지만, 방응현이란 선비가 환로에 나가지 않고 시서와 영농에 대한 관심은 물론 풍속교화 활동에도 깊이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남명선생이 때가 오면 현실 정치로 나갈 생각을 가졌던 것처럼, 사계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때를 기다리며 은인자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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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진강변에 있는 보인대 바위 

 

문회계에 참여했던 인물을 보면, 진사 김선(金瑄, 1599~1614), 유학 이이순, 진사 김집金潗, 진사 장질, 생원 진사 김화, 참봉 오정식, 생원 진사 최상훈崔商訓, 부사 최보, 참봉 변상익邊尙益, 좌윤 최연崔衍, 찰방 방원진, 선교랑 김영진金英振, 판관 한경생韓慶生, 유학 정수 등 14인이다. 모두 생진에 합격하고 과거를 단념했거나 벼슬 살다가 내려온 사대부가의 지식인들이다. 

 

정자 앞의 섬진강변 바위에 보면, ‘삼익대’(三益臺), ‘보인대’(輔仁臺)라고 새겨져 있다. 아마도 <논어>의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친구’(익자삼우益者三友)와 ‘그 좋은 친구의 도움으로 내가 훌륭해진다’(이우보인以友輔仁)는 뜻을 취한 것일 것이다.

 

이들 14인은 남전 여씨 향약 규범에 따라, ‘덕업상권’德業相勸(덕스러운 일은 서로 권한다), ‘과실상규’過失相規(과실이 있을 때는 서로 깨우쳐 준다), ‘신의상교’信義相交(신의가 있는 일은 서로 바꾸어 한다), ‘환난상휼’患難相恤(어려운 일을 당하면 서로 위로하고 도운다.)의 4개 강목綱目을 정하여 매년 4월 4일과 9월 9일에 ‘향음주례’鄕飮酒禮를 열었다.

지금도 그 후손들이 정한 날에 모여 계회를 열고 향음주례를 시연해 선현의 좋은 유풍을 이어 오고 있다며, 내년 4월에 초청하겠으니 오라고 한다. 우리 고장의 몇 분을 모시고 꼭 가마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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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탄정 

 

정자 옆에 ‘횡탄문회기적비’(橫灘文會紀蹟碑)가 서 있다. 읽어보니 추연 권용현(秋淵 權龍鉉1899~1987)선생의 글이다. 추연은 덕천서원 원장을 지낸 상암 권준(1578~1642)의 후손으로 간재 전우(艮齋田愚, 1841~1922)의 문인이다. 지금 초계의 ‘태동서원’(泰東書院)에 향사 되어 있다.

남원의 문화 유풍에 남명의 훈도가 끼쳐 있다고 하면 안 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 후손 방근동이 부귀영화를 다 던지고 고향에 와서 선조의 유업과 고장 문화 진작에 매진하는 것을 본 것이 이 글을 쓰는 사람의 즐거움이다. 방근동 씨에게 고마운 마음과 격려를 보낸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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