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4) 남원 거사 방응현이 남명선생에게 수학한 까닭은

산청시대 2021-10-21 (목) 12:24 1년전 23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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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정사


대역大易의 원형이정 생장수렴(元亨利貞 生長收斂)하는 이치로 볼 때, 지금은 ‘형’ ‘장’의 계절이다. 만물이 무성하게 성장하는 여름의 초입이다. 6월 8일 아침에 집을 나서서 남원으로 향해 자동차 액셀을 밟는다. 나의 뜰엔 백합 향기가 퍼지고 있고, 연도의 산야는 밤꽃향이 가득하다. 오늘 오백 년 연원가를 찾아 그 유적과 그 자손의 사는 모습을 찾아 만나보는 즐거운 날이다. 사계정사沙溪精舍로 가는 것이다.  

 

남명선생은 언제 어느 계절에 무엇 때문에 남원을 갔을까? 사계정사 주인 방응현(房應賢, 1524~1589)과는 23살이 차이가 난다. 정사 시판의 시를 보면 ‘방로가성천해동(房老家聲擅海東) 방씨 노인 집안 명성 해동에 드러났고’라 했다. 아마도 이 ‘방로’는 방응현의 아버지 방한걸房漢傑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면 이분과는 어떻게 친면이 있어서 만났을까? 방응현의 스승이기도 한 일재 이항(李恒, 1499~1576)과 남명선생은 어릴 적 서울에서 사귄 사이다. 이 일재를 통하여 알게 되었고, 아마도 방한걸이 아들을 산천재로 보내서 배우게 한 것 아닐까? (정우락, <선비문화> 2006) 짐작할 뿐이다. 누군가의 소개로 방씨를 찾았다가 선생의 인품을 보고 ‘이 어른을 따라가 배워라’ 했을까? 상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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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정사에 걸린 남명선생 시판 

 

사계 방응현의 후손 방근동房根東씨와 미리 전화로 약속을 해놓고 밤머리재를 넘어 남원으로 달렸다. 오백 년 전의 선생도 이 길로 종자 두셋을 데리고 길을 나섰겠지. 남원에서 방근동을 만나 반갑게 인사하고 바로 사계정사로 향했다. 남원시 주생면 영천리 유매楡梅마을. 저만큼 사계가 흐르고 멀리 지리산 연봉이 병풍 친 듯 동쪽을 벌여 섰다. 정사의 사방 벽에는 기문과 시판詩板으로 빈틈 하나 없다. 어떻게 한 선비의 정사에 이렇게 대단한 분들의 글이 빼곡히 붙어 있을 수 있는가? 

 

사계정사 원운은 누가 지었을까? 허균(1569~1618)의 ‘제방사계준부응현정사’(題房沙溪俊夫應賢精舍)에는 방응현의 것이라 했지만, 송순(1493~1582)의 <면앙집>, 이항(1499~1576)의 <일재집>(一齋集), 이수광(1563~1628)의 <지봉집>(芝峯集), 전식(1563~1642)의 <사서집>(沙西集) 등에서 ‘소재가 처음 지은 것이다’ 했다. (정우락, <남명학의 생성 공간> 2014) 

 

기문은 어우 유몽인(於于 柳夢寅, 1559~1623)이, 실기 서문은 매산 홍직필(梅山 洪直弼, 1776~1852)이, 시판 서문은 현주 조찬한(玄州 趙纘韓, 1572~1631)이, 사계정사 <창수후록>(唱酬後錄)은 노사 기정진(蘆沙 奇正鎭, 1798~1879)이, 또 사계정사 기문이 있는데, 월사 이정구(月沙 李廷龜, 1564~1635)가 지었다. 

원시를 따라 차운한 시들을 보면, 노수신(1515~1590), 이항, 조식, 송순, 조희문(1527~1578), 백광훈(1537~1582), 이달(1539~1612), 조희일(1575~1638), 이정구, 후손 방원진 등 일세의 명류 들과 후손들의 시. 33인 37수가 걸려 있다.  

 

온 국내 명사들의 이름이 가득해 바라보니 현기증이 나려 한다. 집에 가면 고문서들이 많이 있어 전시관을 하나 짓는 것이 꿈이라 한다. 정사는 야트막한 작은 산 위에 있고 그 앞은 넓은 들이다. 옛날엔 질펀한 시냇물이 흘러 자갈과 모래밭이 싱그러웠을 것이다. 근세에 모두 개간해서 지금은 과일밭과 전답이 펼쳐져 있고 정자 주위는 소나무가 울창하다. 사계 방응현이 1560년(명종)대에 지어 1597년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다가, 1607년(선조4) 손자 만오 방원진(晩悟房元震, 1577~1649)이 다시 지었다. 중수와 개축을 거듭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정사는 1863년에 중건한 것이다. 

방원진은 조부의 은거지에 정사를 다시 짓고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화공을 시켜 그림을 그렸다. 지금 고려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는 ‘사계정사도’(沙溪精舍圖)가 그것이라 한다. 이 그림 아래에는 ‘제사계정사도’(題沙溪精舍圖)라는 발문이 있다. ‘조선 사대 문장가’ 중의 한 사람인 상촌 신흠(象村 申欽, 1566~1628)이 쓴 것이다. 그 글에 정사를 지은 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사계는 산수가 수려하여 한 지방에서 으뜸가고, 방씨는 학문을 닦고 덕을 쌓아 한 지방에서 빼어난 자가 되었으니, 대개 이른바 신령스럽고 수려한 땅에서 인걸이 난다는 것이다. 상상하건대, 그는 시냇가 수풀 사이에서 휘파람 불고 노래하며 자유자재로 놀던 신선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인데, 지금은 볼 수가 없다. 그의 손자 원진이 병화 뒤에 유업을 잃지 않고 조그마한 집을 지어서 그 자취를 그려놓고 문인에게 부탁하여 기록해 전하니, 그 가업을 대대로 이었다고 하겠다.’(정우락 <남명학의 생성 공간>) 

 

그 할아버지의 유적을 화공을 불러 그림을 그리고 대문장가에게 부탁하여 좋은 글을 남기니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신흠은 시를 지어 사계정사도의 끝에 남겨놓아 그 속에 고고하게 살던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애틋한 정서로 표했다.

 

신흠이 그림을 통해 만났던 방응현, 그는 어떤 사람인가? 이름을 응주應周라고도 했으며,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준부俊夫, 호는 사계沙溪다. 시조 방계홍房季弘은 당나라 상국 방현령房玄齡의 후손이라 한다. 고조인 구성九成이 정산(지금 서산?)현감으로 와서 남원의 주포周浦마을로 옮겨와 살면서 이곳이 세거지가 되었다.

 

월사 이정구가 방응현의 손자 원진의 부탁으로 <사계정사기>와 ‘사계거사묘갈명’(沙溪居士墓碣銘)을 썼다. 거기에서 ‘남명과 일재의 문하에 유학하면서 학문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는데, 마침내 과거 공부를 포기하고 집에 고요히 앉아 사서를 읽으면서 과농課農과 이포理圃, 관개灌漑와 화죽花竹 등에 관심을 두고 유유자적하였다.’라고 하여 그의 삶에 대한 성향을 짐작하게 된다. 

 

또 원진은 허균에게 청하여 ‘사계정사기’를 받았다.

‘특히 그 중에도 오직 방씨 일족만이 더욱 인륜의 영예를 누렸는데 지금 생존하여 세상에 울리는 자는 상사上舍 방군(방원진)을 가장 추앙한다. 군은 문장과 행의가 두루 갖추어져 초야에 숨어 수신한 적이 여러 해였다. … 이미 월사 상촌 두 분에게 글을 청하여 그 시말을 기록하였으며, 또한 남명 소재의 시를 걸어 당대의 명작으로 이어놓았다. 이로써 수풀과 산이 더욱 빛나고 연못과 정자가 생기를 발하였으니, 실로 인간 세상 밖의 신선이 사는 동천이었다.’(정우락 <상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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