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과 동주의 약속 ‘명주지맹’(冥洲之盟)

산청시대 2021-11-18 (목) 10:02 2년전 14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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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서원
금화서원에 배향된 분은 어떤 분들인가?
◇최운 : 1518(중종 13)년 유일로 천거되어 벼슬길 진출, 황간 현감이 되었다.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되어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이듬해 체포되어 추국을 받고 전 가족이 강계로 추방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죄가 풀리자 그의 아내가 유해를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와 장사지냈다.
◇성운 : 선공감부정繕工監副正 세준世俊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비안 박씨로 사간 박효원의 딸이다. 그의 형들이 을사사화로 화를 입자 속리산에 은거하여 여러 차례 벼슬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선조가 제문을 내렸고, 뒤에 승지에 추증되었다.
◇성제원 : 부사 몽선夢宣의 아들, 유우(柳藕, 1473~1537)의 문인. 1553(명종8)년 유일로 천거되어 보은 현감에 제수되었다. 임기를 끝내고 나라에서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다. 규장각 제학에 추증되었다.
◇최흥림 : 본관은 화순, 을사사화로 많은 사림이 화를 입자 보은으로 낙향하여 줄곧 금적산에 은거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수우당 최영경의 재당숙이다. 
 
계당의 오언절구 금적계당(金積溪堂)이다.
억작남명공피면(憶昨南冥共被眠) 추억하노니 옛날 남명과 한 이불 덮고 잤고,
동주동취와계변(東洲同醉臥溪邊) 동주도 함께 취해 냇가에 드러누운 적 있지.
중래휴수인수재(重來携手人誰在) 이제 다시 와 손잡아 줄 사람 누 있던가?
유수운한사석년(流水雲漢似昔年) 흐르는 물 한가로운 구름은 옛날과 같건만.
(계당집, 2020 이춘희 역, 최원태 편)
계당은 지금은 금화서원의 강당으로 사용되고 있다. 서원의 강당이 복원되지 못하고 사당만 있기 때문이다. 계당 앞을 계정溪庭이라 부르는데, 금적산(652m)에서 내려오는 계곡을 이용한 자연 정원이라는 뜻이다. 폭포와 자연적인 기암괴석이 아름답다. 계곡을 조금 올라 보니 측면 바위에 취와계醉臥溪라 새겨져 있다. 취해서 시냇가에 드러눕는다는 뜻 아닌가? 계당 앞마당에는 반석을 파서 유상곡수流觴曲水(구불구불한 물길 따라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던 풍류)를 한 흔적이 남아 있어 계당이 벗을 불러 풍류를 즐긴 모습을 상상할 수 있다. 금화사의 앞을 바라보면 좌우 청룡 백호가 감싸 있고, 멀리 산맥이 구불구불 흐르는 모습이 보인다. 바로 앞의 경사가 낮은 벌판은 과수와 전답이다. 조금 더 마을 쪽으로 내려오면 최 씨 고가 마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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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서원에 배향된 남명선생 위패

남명이 떠나오자 보은 지방의 모든 사람이 섭섭해했지만 가장 섭섭해하는 사람은 바로 성제원이었다. 성제원은 남명이 지나갈 길목마다 미리 전별연餞別宴을 준비해 두었다가 남명이 그 지점을 통과할 때면 술자리를 마련하여 전송하였다. 마지막 지점의 전별연에서는 성제원이 남명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떨구며 말을 건넸다. 

“그대나 나나 모두 노인이 다 되었고, 또 각각 멀리 떨어진 고을에 사니 언제 다시 만날 수 있겠는가?”
“마음이 있으면 만날 수 있다네, 내년 팔월 보름날 가야산 해인사에서 만나도록 하지.”
남명의 제안에 성제원은 굳게 약속했다. 
“그때 내가 벼슬을 버리고 해인사로 가겠네.”
(허권수, <절망의 시대 선비는 무엇을 하는가>)

세상 사람들이 이 일을 ‘명주지맹’(冥洲之盟, 남명과 동주의 약속)이라 한다. 팔월 보름날 비가 많이 왔다고 한다. 남명은 종자의 만류에도 물이 불은 내를 건너 해인사에 도착했는데, 동주는 일주문에 들어서서 막 도롱이를 벗고 있더라 한다. 뒤에 연암 박지원(1737~1805)이 안의 현감을 할 때 경상도에 와서 근무하던 감사, 수령 친구들을 모아 해인사에서 시 모임을 열었는데, 그 ‘해인사창수시서’(海印寺唱酬詩序)를 연암이 썼다. 그 글에서 남명과 대곡과 동주에 관한 일화를 언급하면서 난세와 지식인의 자세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히고 있다.

“지원趾源이 이공(관찰사 이태영李泰永, 1744~1803을 말함:필자 주)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옛날 남명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보은 사는 성대곡을 찾았더니 마침 성동주成東洲가 그 고을 원으로서 그 자리에 와서 있었다’고 합니다. 남명이 동주와 초면이었으나 농담으로 ‘노형은 참한 벼슬자리에 오래도 계시오’라고 말하니, 동주가 대곡을 가리키고 웃으며, ‘이 늙은이에게 붙잡혀서 그랬소만 올해 8월 보름날 내가 해인사에 가서 달이 떠오르는 것을 기다릴 것이니 노형이 그리로 오실 수 있겠소?’하고 대답하였답니다. 남명이 곧 승낙하였습니다. 그 날짜가 되어 남명이 소를 타고 약속한 장소로 가는 도중 큰비를 만나서 겨우 앞내를 건너 절 문에 들어갔는데 동주는 벌써 누 다락에 올라가서 막 도롱이를 벗고 있더랍니다. 아하, 그때 남명은 처사의 몸이요 동주도 이미 벼슬자리를 떠났건만 밤새도록 두 분의 이야기는 백성의 생활 이야기였답니다. 이 절의 중들이 지금까지도 옛이야기로 전해오고 있습니다.”

이 기사에 뒤이어 자기시대 지방 수령들의 그릇된 행태를 언급한 다음 당대 수령들의 그러한 행위가 “백성의 생활에 무슨 도움이 되겠습니까? 언제나 이 누 다락에 오를 때마다 쓸쓸한 생각으로 옛 어른의 비 맞은 도롱이를 연상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라고 끝을 맺고 있다. 

유일遺逸이라는 은일적 삶의 형태가 지식인의 처세의 유력한 한 형태로 본격 등장하는 16세기라는 시대에 남명과 대곡은 그러한 은일적 삶의 전형을 보여준 대표적 인물이다. 그들은 자기 당대의 시류와 세태에 타협하지 않고 강인한 정신과 신념을 견지하면서 자기의 사상과 방식대로 시대를 삶으로써 우리 정신사에서 보기 드문 강렬한 주체적 인격의 한 전형을 탄생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장원철, <은둔과 자적의 미학 : 남명과 대곡> 남명학연구 2002)

16세기 그 혼돈의 시대에 처사적 삶을 산 그분들의 모습을 생각하며 어느 날 보은의 처사를 찾아가 시대를 아파한 일을 오늘까지도 기념하고 있는, 보은 사람들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보았다.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한 번 더 성찰하고 연암처럼 옛 어른들을 늘 마음속에 되새기면서 살아야 선진국민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처사로 살고 간 대곡의 무덤은 너무 적막했다. 그러나 묘비문은 우계 성혼(1535~1598)이 지었고, 별도로 묘갈명이 신도비처럼 비각 안에 서 있는데, 우암 송시열(1607~1689)이 짓고 동춘당 송준길(1606~1672)이 썼으니 처사에게 예우를 다했다 할 수 있겠는가?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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