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5) 만 겹 깊은 산, 보은으로 ‘대곡’을 만나러 가다

산청시대 2021-11-18 (목) 10:07 2년전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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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화사

남명선생이 대곡을 만나러 충북 보은을 찾아간 464년 만에 우리는 대규모(?) 답사단을 꾸려 종산鍾山(북실, 모현암慕賢庵), 금화서원(금적정사金積精舍) 계당溪堂 등 대곡 성운, 계당 최흥림(溪堂 崔興霖, 1506~1581),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1506~1559)의 유적지를 찾았다.

남명선생의 서울 생활은 처음에는 동고 이준경(東皐 李浚慶, 1499~1572)형제와 이웃해서 살았고, 대곡 성운(大谷 成運, 1497~1579)과의 첫 만남은 1518년 경이다. 대곡은 물론, 그의 형 성우(成遇, 1495~1546), 종형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1493~1564)과 각별히 친히 지냈다.

 

남명선생 아버지가 함경도 단천 군수에 제수되어 임기를 마치고 돌아와서는 장의동(지금 효자동)으로 이주하여 이웃에 살았기 때문이다. 그 뒤 1528년 아버지의 상을 마칠 때 대곡의 형인 ‘성우’가 서울로부터 상문차 합천 삼가로 내려와서 같이 지리산을 유람했다. 1530년 김해로 이사한 남명은 산해정을 짓고 본격적인 위기지학 공부에 들어갔다. 이때 대곡 성운은 서울로부터 산해정으로 남명을 찾아왔다.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 1501~1568), 송계 신계성(松溪 申季誠, 1499~1582),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1504~1559)과 함께 모여 여러 날 동안 강론하니, 사람들이 ‘덕성德星이 모였다’고 했다. 

 

이 시기 서울에는 한차례의 회오리가 일었다. 인종(재위 1544~1545)이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명종(재위 1545~1557)이 즉위하여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면서 결국 소윤이 승리하게 되고 그 과정에 선비들이 많이 죽은 이른바 ‘을사사화’가 일어났다. 이 사화로 대곡의 형 성근(成近, ?~1546), 성우가 죽고, 남명과 대곡의 절친했던 벗 이림(李霖, ?~1546), 곽순(郭珣, 1502~1545)이 죽었다. 대곡은 처향인 보은으로, 대곡의 종형 성수침은 북한산 밑에 청송당을 지어 벼슬과는 먼 생을 살았다. 이에 남명은 대곡을 찾아보지 않을 수 없었다. 

 

‘대곡에게 주다(기대곡寄大谷)’라는 시를 보자.

만첩궁산초합문(萬疊窮山草合門) 만 겹으로 깊은 산중 풀이 문을 가렸는데,

지봉당도편생손(地蜂當道遍生孫) 땅벌이 길바닥에 손자를 쳤구려.

아함홀급경하정(我?忽急驚何定) 아함 소리 문득 급하니 놀람을 어찌 진정하리오,

노루상간구시언(老淚相看久始言) 늙은이 눈물로 서로 보고 한참 만에 말을 한다.

형제기연무처거(兄弟棄捐無處去) 형제가 세상을 떠났으니 갈 곳이 없고,

우붕령락유수존(友朋零落有誰存) 벗들이 모두 죽었으니 살아있는 이 누구던고?

독고기식삼동사(獨孤寄食三冬事) 홀로 되어 기식하던 지난 삼동의 일은,

당일도망미여론(當日都忘未與論) 그 당시를 다 잊어버려 의논할 수 없구나.

 

충북 보은군 보은읍 종곡리, 약간 너른 분지형의 들판 가운데 조그만 산이 있다. 이 산이 종산鐘山(북산)이다. 주위에는 인삼을 심은 곳이 많고 간간이 대추나무 과원이 보인다. 이 독메(獨山)를 지나 조그만 개울을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작은 서재 모현암(慕賢庵)이 있다. 종곡은 처가 경주 김씨가 세거하던 곳이라, 사화로 형제들이 모두 화를 입자 처향으로 와서 살게 된 것이다. 장인 ‘김벽’은 충암 김정(1486~1521)의 종형이다. 대곡은 자식이 없어 처질 김가기(1537~1597)가 후사를 맡는다. 이 서재에서 김천부(1498~1584), 김천우(1505~1548), 김천주 등 세 처남과 같이 절차탁마했으리라 짐작한다.

 

이 서재는 처음에는 사암斯庵, 글자 그대로 ‘이집’이었다. 대곡이 죽은 뒤 ‘대곡재’(大谷齋)라 부르다가 1887년에 후학들이 옛 어른을 사모하여 모현암이라고 현판을 걸었다 한다. 남명선생은 대곡과 열흘을 같이 지내다가 최계당의 금적정사金積精舍로 갔다. 계당 최흥림의 정사에는 온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남명선생의 강론을 청했다. 매일 한 강의 씩 사흘을 강의했다고 편년에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 두 강의의 제목만 기록되어 있다. 

 

첫날은 ‘왕패취사지변’(王?取捨之辨)을 강했다. 왕도와 패도를 취하고 버리는 변별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다. 왕도는 천하를 잘 다스리는 편안한 통치, 즉 지금의 자유민주주의를 잘 펴서 평화로운 정치를 하는 것이고, 패도는 무력으로 정권을 잡아 무도한 정치를 하는 것을 말한다. 아마도 위정자가 무도한 정치를 할 때는 그 위정자를 쫓아내고 왕도로 돌아오게 하는 것을 강의했을 것이다. 이는 전에 ‘민암부’편에 기술한 바와 같이 백성이 근본이므로 그 근본으로 돌아오게 하는 백성의 권리를 행사하는 이치를 설파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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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현암

 

다음 날은 ‘정일중화시설’(精一中和之說)을 강론했다. 마음을 전일專一하게 유지해서 중화를 이루는 방법이 무엇인가, 경敬을 체득하는 공부다, 상성성常惺惺, 늘 깨어있고 한 가지에 오로지하여 사욕에 흔들리지 않는 마음, 그런 공부가 되지 않으면 중화中和를 이룰 수가 없는 것이다. 귀로 들어서 입으로 달달 외우는 것은 ‘앵무鸚鵡의 학문’이라고 선생은 늘 말했다. 몸으로 체득해서 스며들어야 그대로 실천을 이룰 수 있는 것이라고 강의했으리라. 

 

삼 일째의 강의가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남명선생을 고을 유림 들이 금화서원에 향사하게 된 것이다. 금화서원은 1557년 가을 어느 날 유명한 선비들이 모인 일을 기념하기 위해 1758(영조 34)년에 지방 유생 강재문 등 106인의 발기로 서원을 설립했다. 최운(崔澐, 1500~1520), 성운, 조식, 성제원(1506~1559), 최흥림(崔興霖, 1506~1581)을 봉안했다. 이 다섯 분을 봉안하고 3월 말정末丁, 9월 초정初丁에 향사한다고 한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1871(고종8)년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지방 유림의 노력으로 1967년 복원되었으나 강당과 재실은 복원하지 못하고, 서원 앞에 있는 계당溪堂을 강당 대신 사용하고 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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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곡묘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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