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청도 지역 도학은 남명과 밀접한 관계

산청시대 2021-12-01 (수) 05:28 2년전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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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대
삼족대는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동창천변의 갓등산 기슭의 절벽 위에 있고, 묘소는 서북쪽으로 돌아간 산기슭에 있었다. 삼족당과 그 부인 벽진 이씨의 무덤 아래는 아들 김성 내외의 무덤이 있다. 
우리 일행은 모두 선생의 절친했던 벗 삼족당의 묘소에 별세 470년 만에 참배했다. 그리고는 박하담과 그 후손의 고택을 둘러 보고 만화정萬和亭과 선암서원 소요대 등을 둘러 보았다. 만화정은 소요당이 살던 집을 후손들이 수리해 지은 별서別墅인데 6·25전쟁 때 이승만 대통령이 동창천으로 피난민을 위무하기 위해 왔다가 숙식한 집으로도 유명하다. 

삼족당은 후손이 흥하지 못한 반면 소요당은 후손이 매우 흥성했다. 소요당의 손자 박경전(1553~1623)은 의병장이 되어 박씨 문중 14 의사가 임란에 거의 했다. 14 의사는 모두 소요당의 손자 증손자들이다. 그 조직을 보면, 포획장捕獲長 이득복李得福은 박경전의 고종 형이고 대장代將 박경인朴慶仁은 그의 종형, 아익장亞翼長은 아우 경륜慶胤, 경선慶宣이 되는 등. 그 외 사족 자제들이 참모가 되어 운문산 일대에서 왜적과 싸우고 곽재우와도 호응하였다. 장동표는 ‘조식은 청도에 자주 내왕하여 이 지역 인사들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고 이러한 것이 이후 청도 지역 의병 활동의 기반이 되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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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대 편액

청도는 삼한 시대 이서국伊西國이었다. 신라 유리왕 때 병합되어 오악현烏岳縣, 형산현 荊山縣, 소산현蘇山縣을 두어 밀성현密城縣의 영현領縣으로 소속되었다. 오산군鰲山郡으로 1109(고려 예종4)년 감무를 설치하였으나 밀양의 속군이었다가 1336(공민왕15)년에 다시 군으로 하였다. 
17세기 중엽에 간행된 오산지鰲山誌에 의하면 토성은 김金, 백白, 신申, 이李, 조曺이며, 15, 16세기를 거치면서 청도 지역의 대표적인 사족 가문이 된 김해 김씨金氏와 밀양 박씨朴氏는 김해와 밀양 지역에서 이주하여 족세가 번성한 가문이다.

청도의 종유인 세분을 간략히 서술한다.
◇삼족당 김대유(1479~1552)의 자는 천우天祐이다. 탁영 김일손(1464~1498)의 선계는 김해에서 향리鄕吏를 세습하던 한미한 가문이었으나, 6대조인 김관이 등제하여 고려 충선왕 때 판서의 벼슬을 함으로써 사족으로 성장하게 된다. 청도 입향조는 고려 충숙왕 때 문과로 도제고판관都祭庫判官을 지낸 고조부 김항金伉이다. 증조인 김서金?는 권신 기철(奇轍, ?~1356) 토벌의 공으로 2등 공신에 봉해졌다. 김서는 청도 운계리에 퇴거하여 정몽주 길재 등과 종유하였고 조선 태종 때에는 공신으로 분릉군盆陵君에 봉해졌고 의흥 현감을 지냈다. 할아버지 김극일(1522~?)은 시효가 절효공節孝公으로 김해김씨 삼현의 한 분이다. 조부는 판관 맹孟이고 아버지는 준손駿孫, 숙부가 탁영 김일손이다. 
삼족당 김대유는 소요당 박하담과 함께 16세기 청도지역 학문 정착과 향약의 실시, 사창社倉을 창설하여 휼민 사업을 하는 등 향촌 사회 교화에 큰 업적을 남겼다.

◇소요당 박하담(1479~1560)의 자는 응천應千이다. 청도 밀양 박씨는 그 중조가 고려 문종 대에 태사중서령太師中書令을 지낸 밀성부원군 박언부朴彦孚다. 청도에 입향한 것은 부사직을 역임한 10세 박건朴乾 때였다. 박건 조부 박익(朴翊, 1332~1398)은 조선조에 들어와 좌상으로 증직되면서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박건 아버지 박융(朴融, ?~1424)은 정몽주의 문인이며 이조정랑을 지냈다. 박건의 아들 박승원은 사직司直을 역임했다. 박승원의 아들이 소요당 박하담, 성와 박하청(1481~1541), 병재 박하징(1484~1566)이다. 그의 손자와 증손자 등 14명이 임란 창의하여 14 의사라 부른다.

◇경재 곽순(1502~1545)의 자는 백유伯瑜다. 소재 노수신(1515~1590)이 쓴 경재의 묘갈명에 의하면 청도 대평촌에 대대로 살았다. 증조 곽성기郭成己는 사온서司?署 직장直長을 지냈고, 조부 효원孝元은 장기長? 훈도訓導, 아버지는 사재감 첨정司宰監僉正 수녕遂寧인데 영천 김씨 충순위 김철서의 딸에게 장가들어 영천에 옮아 살았다. 장령으로 있을 때 조광조의 신원을 상소하였으며 인종 즉위 후 관직을 버리고 운문산에 들어갔으나 을사사화에 추국을 받다가 장살 되었다. 영천 송곡서원松谷書院에 제향 되었다.

16세기 청도지역의 도학은 남명과 관계가 깊었다.(장동표, ‘조선 중기 청도 지역 향촌 지배구조의 성립과 변동’). 남명은 밀양과 청도에 자주 내왕하였다. 밀양의 송계 신계성은 남명과 절친해 김해의 ‘신산서원’에 같이 제향 되어 있다. 송계는 김대유가 죽자 만사를 지어 보내기도 했고, 남명은 삼족당이 죽자 묘갈명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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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당 묘비
청도는 1518년 이서면 서원리에 ‘자계서원’紫溪書院을 세워 김해 김씨 3현인 절효 김극일, 탁영 김일손, 삼족당 김대유를 향사하고 1660년에 사액 받았다. 1577년에는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삼족당과 소요당을 제향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금천면 신지리에 있다.
또 향사당鄕社堂과 사창社倉을 건립 시행했다. 향사당은 재지사족들이 향사례 외 향음주례, 향약의 보급 등 향풍을 순화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이고, 사창은 공설인 의창의 실태가 미미해지자 사유재산으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기구이다. 이와 같은 향풍의 영향에는 남명 선생의 영향이 컸다는 것을 체득했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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