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6) ‘화산을 실을 만하였네’ 남명 선생 청도 벗들

산청시대 2021-12-01 (수) 05:31 2년전 1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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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 선암서원
금곡金谷의 언덕에 묻혔으니, 운문산雲門山 골짜기로다. 
학문이 깊은 훌륭한 사람, 화산을 실을 만하였네.

 

 

남명 선생보다 22살이 많은 망년忘年의 절친, 삼족당이 세상을 뜨자 남명 선생이 지은 ‘선무랑 호조좌랑 김공 묘갈명’(宣務? 戶曹佐? 金公 墓碣銘) 명銘의 서두이다. 

‘화산을 실을 만하였네’라는 말은 <중용>의 ‘급기광후 재화악이부중’(及其廣厚 載華嶽而不重)에서 따온 말이다. 

‘그 넓고 두터움에 미쳐서는 화악(화산華山)을 싣고 있어도 무거워하지 않는다.’ 곧, 사람의 덕이 큰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현전하는 기록 중 남명의 벗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로는 무민당 박인(1583~1640)이 편집한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1636)과 묵재 김돈(1702~1770)과 어은 박정신(1705~1769)이 편찬한 <남명선생별집>南冥先生別集(1764)의 사우록師友錄, 복암 조원순(1850~1903)이 편집한 <산해연원록>山海淵源錄(1764), 담헌 하우선(1894~1975) 등이 편집한 <덕천사우연원록>德川師友淵源錄이 있다.

 

남명 사후 가장 이른 시기에 만들어진 <산해사우연원록>에는 모두 24인의 종유인從遊人이 실려 있다. <남명선생 별집>에 실린 사우록은 사실상 <산해사우연원록>과 동일한 것이며, 조원순이 편집한 <산해연원록>은 기존의 연원록에 빠진 인물을 많이 보충하였으나 완전한 모습이 아니어서 기준으로 삼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 가장 늦은 시기의 <덕천사우연원록>은 모든 기록을 참고하고 가감하여 52인의 종유인을 수록하고 있다. (강정화, <남명과 그의 벗들>)

 

지난번에 쓴 보은의 이야기나 이번 회의 청도 종유인의 경우를 보면 남명 선생의 벗을 사귀는 취향을 알 수 있다. 

사우師友라는 말은 스승 삼을 만한 벗을 이르는 말이다. 옛날의 사제지간이라는 말은 스승의 앞에 책을 펴고 배우는 것만 사제 간은 아니었다. 찾아뵙지 못하고 멀리서 편지로 의난을 질문해서 답을 얻은 것으로도 제자라 할 수 있고, 찾아뵙고 의문점을 질의 토론한 사람도 물론 제자이다. 같이 몇 날을 지내며 도덕 인격에 감화를 받았어도 제자이다. 그렇다면 친구도 사귀고 만나는 사이에 ‘바람이 불어 풀이 눕듯’ 인격에 차츰 교화 변화를 준다면 진실한 친구요 제자가 아니겠는가? ‘남명학파’를 제자, 사숙인은 물론, 종유인從遊人까지를 포함해야 한다는 주장에 나는 찬성한다.

 

학술적으로는 나의 의견이 맞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가령 사명당 유정(1544~1610) 스님은 남명 선생보다 43살이 어리다, <남명선생 편년>에 의하면 1566년 2월 단속사에서 구암 이정(512~1571)을 만난 기록이 나온다. 그때 유정은 단속사에 있었다. 만약 그때 ‘증유정산인’(贈惟政山人)이라는 시를 지어 주었다면 유정의 나이 23살이었을 것이다. 사명당이 임란 의병을 일으킨 것은 그때 이후 남명의 감화는 아니었을까?

 

강정화 교수의 <남명과 그의 벗들>에 의하면 소요당 삼 형제와 남명과의 친분을 의심하고 있다. 내암 정인홍이 쓴 <소요당 박공행적>에 남명과의 교유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는 점, <남명집>에 1568년 9월 18일, 당시 청도 수령이던 이유경에게, 청도 지역에서 소요당과 삼족당이 창설했던 동창 자리에 사당을 세워 그 사모하는 마음을 표현하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편지를 보냈는데, 탁영과 삼족당 만 배향하고 다른 인물을 배향하는 것에 반대했다는 것. 또 <소요당 일고>에 있는 ‘제조건중덕산은거’(題曺楗中德山隱居)라는 시는 남명이 덕산에 들어온 것은 1561년이고, 소요당이 세상을 떠난 이듬해라는 것 등을 들어 소요당과의 종유를 의심한다. 강 교수는 “당시 남명의 영향력이 원체 대단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 남명과 연결하려 한 후손들의 노력을 모르지 않는다.”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가 생각건대, 박 소요당과 김 삼족당은 동갑이며 매우 절친해서 향로당, 사창 운동을 같이했고, 후생들이 선암서원仙巖書院을 지어 두 분을 배향했고, 남명과도 절친한 성수침 형제가 우계牛溪에서 시묘한다는 소식을 듣고 방문하여 위문하기도 했으며, 경재 곽순(1502~1545), 송계 신계성(1499~1562) 등과도 교유한 점 등으로 볼 때 교유가 있었던 것은 맞으나 삼족당의 인물됨이 너무 크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었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16세기 단계 영남 지역에서의 도학은 남명과 퇴계가 쌍벽을 이루고 있었고, 청도의 도학은 남명과 관계가 깊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명 조식은 청도에 자주 내왕하여 이 지역 인사들과 시유詩遊하면서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청도의 남북 분당에서 남인 가운데에도 남명의 학문적 영향이 깊이 배어 있다. 이러한 점은 이후 청도 지역 의병 활동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한편 남명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송계 신계성(1499~1562)은 삼족당이 죽자 만사輓詞를 지어 보내기도 하였고, 남명 자신은 삼족당 사후 ‘호조좌랑김공묘갈문’을 찬하였다. 그리고 한강 정구가 찬술한 ‘삼선생봉안문’(三先生奉安文)이 있는 것으로 보아 16세기 단계까지의 청도 지역의 유학은 남명 연원 중심으로 이어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장동표, ‘조선 중기 청도 지역 향촌 지배구조의 성립과 변동’)

 

삼족당은 칠원 현감에 제수된 지 몇 달 만에 물러나 운문산 아래에 집을 짓고 삼족당이라 하였다. 

<남명선생 편년> 52세 조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삼족당의 장례에 선생이 가서 곡하였으며, 뒤에 묘갈명을 지었다. 삼족당이 선생의 빈궁함을 염려하여 임종할 때에 손수 ‘매년 곡식 얼마씩을 보내주어라’라는 내용을 적어 여러 아들에게 명했다. 선생이 받지 않고 시를 적어 사례하였다.’

 

묘갈명 일부를 소개한다.

‘…공 같은 사람은 세상을 뒤덮을 만한 영웅이었다. 운문산 골짜기를 지키던 믿음직한 사람이 지금은 세상을 떠나고 없으니, 아, 애석하구나!… 내가 남을 보증하는 경우가 대체로 드문데, 유독 천하의 훌륭한 선비로 인정해주는 사람이 공이다. 어떤 때 보면 단아한 모습으로 경사를 토론하는 큰 선비이고, 또 다른 때 보면 훤칠한 키에 활쏘기와 말달리기에 능숙한 호걸이다. 홀로 서당에 거처하면서 길게 노래를 부르고 느릿느릿 춤을 추기도 하는데, 집안사람들은 그 의중을 집작하는 이가 없었으니,… 크게 일을 이루려 하였으나 자기만을 이루었을 뿐이니, 천명인가? 시운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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