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의 학술문화 공간 덕천서원’

산청시대 2021-12-15 (수) 00:32 2년전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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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본 덕천서원

2017년 8월 4일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에서 ‘남명학의 학술문화 공간 덕천서원’이라는 주제의 학술 대회가 열렸다. 
그때, ‘덕천서원의 공간과 명칭에 담긴 의미(최석기)’, ‘덕천서원을 이끈 강우의 가문들(이상필)’, ‘덕천서원과 그 주변의 문화적 상상력(정우락)’, ‘덕천서원의 건축 : 두 개의 시간대에 걸친 역사의 흔적(조재모)’, ‘덕천서원 경의학으로 디자인한 조선의 인문공간(김학수)’, ‘덕천서원 유생들의 심신 관리 지혜의 모태(원보영)’등 5편의 논문 발표가 있었는데, 김학수의 논문은 학술지 <남명학>에, 다른 분들의 논문은 <남명학연구>에 각각 발표되었다. 

덕천서원의 공간 구성을 보면 맨 위쪽부터 사당, 강당, 전사청, 동서재, 정문, 휴식소 등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 옆으로 주사와 관리사가 있다. 건축물의 기능에 따를 이름을 지을 적에는 남명 선생의 사상이 나타나도록 이름을 지었다. 최석기의 상기 논문에 따라 공간 명칭을 약술한다.

1. 경의당敬義堂
강당의 이름을 경의당이라 한 것은 남명학의 요체인 경敬, 의義를 취한 것이다. 내면의 덕을 밝히는 것은 경이고, 외적으로 일을 결단할 때는 의리를 따른다는 말이다. 남명학을 실천 유학이라 하는바, 내적으로 양심을 회복하고자 하는 실천과 외적으로 사회적 정의를 이룩하고자 하는 실천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도학군자의 덕화가 미쳐 명실상부한 강우학파의 본산을 이룬 곳이다.

2. 진덕재進德齋와 수업재修業齋
덕산서원을 창건했던 당시 동재는 경재敬齋, 서재는 의재義齋로 명명했다. 그 후 불과 15년 뒤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 그리고 약 15년 뒤에 중건했는데, 1609년 덕천서원으로 사액이 내린 뒤 동재를 진덕재, 서재를 수업재로 바꾸었다.

선생 편년 61세 조에 보면 
‘대체로 선생의 학문은 건괘 구삼 곤괘 육이 효사에 ‘육이 직방대 불습 무불리’라고 하였는데, 문언에 ‘직기정야 방기의야 군자 경이직내 의이방외 경립이덕불고(直其正也 方其義也 君子 敬以直內 義以方外 敬立而德不孤)라고 하였으니, 바로 선생의 경의사상이 유래한 곳이다.’
‘곤괘 육이 건괘 구삼 효사에 ‘군자 종일건건 석척야 려 무구’(君子 終日乾乾 夕?​若 ?​ 无咎)라 하였는데, 문언에 ‘종일건건 석척야 려 무구 하위야 자왈 군자 진덕수업 충신 소이진덕야 수사입기성 소이거업야 지지지지 가여기야 지종종지 가여존의야’(終日乾乾 夕?若 ? 无咎 何謂也 子曰 君子 進德修業 忠信 所以進德也 修辭立其誠 所以居業也 知至至之 可與幾也 知終終之 可與存義也)”라 하였으니, 선생의 충신·수사를 중시하는 사상이 유래한 곳이다.’의 뜻에서 터득한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강건하고 날로 새로워 노쇠하여도 조금도 해이해지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곤괘 육이효는 경의사상敬義思想이 유래한 곳이고, 건괘 구삼효는 진덕進德과 수업修業이 유래한 곳이다. 진덕은 충신忠信한 마음으로 온갖 삿된 마음을 막아내고 긴실된 마음을 보존해야 한다는 뜻이고, 수업은 말을 잘 다듬어서 그 정성스러움을 확립한 상태를 의미한다. 또 경재, 의재는 경의당의 뜻과 중복되는 점이 있으므로, 진덕재, 수업재로 바꾼 것이라 볼 구 있겠다.

3. 광풍헌光風軒, 제월헌霽月軒
진덕재, 수업재의 끝에 다락을 만들고 광풍헌, 제월헌이라 하였다. 
북송 때 황정견(1045~1105)이 주돈이(1017~1073)의 인품을 묘사한 말로, 인욕이 깔끔히 제거되어 구름 한 점없는 맑은 하늘 같고, 풀 위에 바람이 불어 물결에 밝은 빛이 흘러가는 것처럼 깨끗하게 정화된 망꼬 밝은 흉금을 형상화한 것이다. 지금은 강당의 협실을 광풍 제월헌이라 한다.

4. 유정문幽貞門과 시정문時靜門
유정문은 주역 이괘履卦 구이효에 ‘걸어가는 길이 평탄하니, 깊숙이 고요하게 거처하는 사람이라야 의지가 견고하고 길할 것이다.’(이도탄탄 유인정길履道坦坦 幽人貞吉)라고 한 데서 취한 것으로, 은자의 정신적 지향을 드로낸 것이다. 시정문時靜門은 ‘덕천사우연원록’에 ‘설창 하철(1635~1704)이 ‘경의당, 시정문’ 여섯 자를 써서 걸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세기 후반에 이미 문루의 이름을 ‘시정문’으로 바꾼 것을 알 수 있다. ‘시정’의 뜻은 ‘시의時宜에 순응하여 고요히 존양한다.’(순시정양順時靜養)(오장1565~1617의 사호집)는 뜻에서 취한 것으로 추측한다. 문루의 복원이 시급하다.

5. 방당方塘
동·서재 사이의 끝부분에 네모난 연못이 있었는데, 덕천서원의 경관은 물론 남명 선생의 정신적 지향을 구현해 놓은 것이다. 못 가운데 섬을 만들어 솔을 심고, 못에는 연을 심었다 한다. 천인합일天人合一을 지향하는 정신을 구현한 것이다.

6. 세심정洗心亭, 취성정醉醒亭, 풍영정風詠亭
세심정이라는 명칭은 하항(1538~1590)이 주역 계사전의 ‘성인이 마음을 씻고 은밀한 데로 물러나 살며, 길흉에 대해 백성들과 더불어 걱정을 함께하여 신묘함으로써 미래의 일을 알고 예지로써 지나간 일을 간직한다.’고 한데서 취한 이름이다. 곧 덕을 가진 군자가 마음을 씻고 은거하여 백성과 길흉을 함께한다는 의미이다. 

얼마 뒤 덕천서원 창건을 주도한 최영경이 취성정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취성’이란 굴원(屈原BC343?~BC278)의 ‘어부사漁父詞’에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탁한데 나만 유독 깨끗하고, 대중들이 모두 취하였는데 나만 유독 깨어 있었네’(거세개탁아독청 중인개취아독성擧世皆濁我獨淸 衆人皆醉我獨醒)라고 한데서 취한 것이다.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혼몽히 취해 있더라도 나만은 또렷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남명 정신을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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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서원

풍영정은 1611년에 정유재란에 취성정이 불탄 자리에 다시 세우고 풍영정이라고도 부른 것 같고, 1815년에 풍영정을 중수하고 이익운(李益運, 1748~1817)이 기문을 지었는데, “세심정 북쪽에 정자를 지어…”한 것 등으로 보아 취성정을 풍영정이라 했고 세심정은 따로 있었다고 알 수 있다. 
따라서 복원되지 못한, 취성정(풍영정)과 문루(유정문), 연못인 방당, 그리고 동서재의 광풍헌 제월헌이 복원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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