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곡사와 단속사 오가며 강론한 남명 선생

산청시대 2021-12-29 (수) 23:42 2년전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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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속사지 정당매

산청읍 내리에 지곡사지智谷寺址가 있다. 

‘절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고려 시대 진관선사(眞觀禪師912~964)가 … 수백여 명의 승려들이 머물렀고, 전성기에는 물방앗간이 12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조선 후기까지 명맥을 이어오다가 1845년(현종 11년) 이후에 폐허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지 내에 있는 귀부龜趺 2기 및 부도 옥개석 등의 현존 유구 양식이나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볼 때 통일신라 말기나 고려 초기로 추정된다.(<잃어버린 절을 찾아서> 2004, ‘진주 불교문화 유적 답사회’). 

 

남명 문인들이 학술대회를 연 지곡사

 

<진주성 승첩장>(晉州城 勝捷狀)에도 진주목사 김시민이 진주성에서의 전투에 대비하여 170여 점의 조총과 화약을 제조하였고, 또한 김성일도 산청 지곡사에서 호남지방에서 모은 숙련공을 통해서 정철正鐵을 가지고 조총을 제조하였다 한다.<전계서> 

지곡사지는 천왕봉에서 시작된 산줄기가 중봉과 하봉으로 이어져 쑥밭재-새재-외고개-왕등재-깃대봉을 거쳐 밤머리재에 이르러 다시 한번 치솟은 웅석봉 아래로 펼쳐지는 가장 포근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전계서> 

오건의 귀향 소식이 알려지자 인근 고을의 선비와 관원들이 모여들어 그가 다시 부름을 받아 상경할 때까지 3~4개월간 산음·단성·함양에서 학술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그중에서도 두 번의 지곡사 강론회와 단속사 및 함양 남계서원 강론회는 산음(오건) 중심의 서부 경남에 있어서 남명 문인들의 단합이요 학술대회라 할 수 있는 것으로 특기할만한 것이다.<전계서>

 

지곡사 거쳐 단속사, 남계서원서 지곡사로

 

첫 번째 지곡사 강론회는 1565년 10월 10일에 있었다. 손승경 편으로 초 5일에 글을 보내 조식 선생을 초청한 다음 도희령, 임희무, 정복현, 오준, 오현, 오탁, 우치적 등 선비들이 모여있었으나 노사老師로부터 병환으로 지곡사에 참석하지 못한다는 기별이 왔으므로 울적한 마음을 시를 읊어 달래며 모두 다음날 헤어졌다.(<산청 향토사> 오주환)  

※이 기사는 덕계 선생 <역년일기>의 10월 10~11일 조에 의한 것으로 <남명 선생 편년>에는 지곡사 강론회에 참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이라고 밝히고 있다. 

 

두 번째 회합은 13~16일간에 단속사에서 있었다. 지곡사에서 헤어진 오건 등은 조식 선생께 하인을 보내 안부를 묻게 하고 다시 단속사로 향하였다. 도희령, 정수복, 오현, 이담, 이준, 이영 등이 모였다. 13일에 조식 선생이 내도하였으므로 오건은 선생을 모시고 3박 4일의 강론회를 가졌다. 진사 권문임과 산음 현감을 지낸 정구가 참여하였다. 16일에 헤어져 돌아갔다.(<상게서>, 이 기사는 <남명 선생 편년>에는 없으나 <역년일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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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계선생 역년일기 

 

강우의 대강회에 인근 현감과 선비 참석

 

세 번째는 11월 10~25일간에 열린 함양 남계서원 대 강론회였다.(내용 생략)

네 번째 강론회는 1566(丙寅) 정초에 … 지곡사에서…일주일간 열린…<상계서>

이때 참여한 사람은 덕계 집안 여러 사람, 우치적, 한찬, 정복현, 김우옹, 조식, 노진, 노과, 임희무, 창녕의 이인지, 산음 현감 이경흠, 권세진, 권문현 3형제, 이천경, 강초, 강진, 정유명, 정원거, 송업, 임우춘, 이경두, 이충준, 단성 현감 안전 등이다. 함양, 거창, 산음, 단성, 진주, 의령, 성주 등의 학자와 수령들까지 모인, 1566년 정월 10일부터 15일까지 열린 강우의 대 강회였다.

 

휴정 판각 ‘삼가귀감’ 소실‥선생께 보고

 

1568년 10월경 단속사에서 한 사건이 일어났다. 

‘무진(戊辰 1568)년 가을에 경상감사 임당 정유길(鄭惟吉, 1515~1588)이 진주목사 최응룡(崔應龍, 1514~1580)과 함께 근 읍 유생들을 모아 시부詩賦 시험을 보았는데, 열 사람을 선발하여 단속사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이때 선발된 사람은 하면, 진극경, 손경인, 손경의, 정승윤, 정승원, 박서구, 이곤변, 하백이었는데, 선생(성 부사)이 그 중에 수석을 했다. 시월에 비로소 단속사에 들어가 공부를 시작했다.…(성여신, <부사집>(浮査集) <부사선생연보>, 송희준, <단속사의 창건 이후 역사와 폐사 과정>). 

단속사에는 휴정(休靜, 1520~1604) 스님이 지은 ‘삼가귀감’(三家龜鑑)의 판각이 있었는데 유가의 글이 맨 뒤에 있었다. 이에 그 판본과 사천왕상四天王像,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 등을 불태워버렸다. 성 부사는 사태의 심각성을 짐작했는지 “여기는 남명 선생이 계시는 산천재가 멀지 않으니 우리가 저지른 이 사건을 알리지 않을 수 없다”하고 동료 한 사람을 보내 보고하고, 다음날 직접 남명 선생을 찾아뵙고 설명하는 사건이다. 이로써 단속사의 폐사를 재촉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다.

 

정당매 풍자 시 쓰며 단속사 찾은 남명

 

단속사는 748년 이순(李純, 699~767)에 의하여 창건되었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의 침략으로 사찰 전체가 불타버려 완전히 폐사가 되고 말았다.(송희준, <전게서>)

단속사, 이 절은 사연도 많고, 전설도 많고, 기록도 많다. 박용국은 그의 저서 <지리산 단속사, 그 끊지 못한 천년의 이야기>를 끝내는 ‘에필로그’에서 ‘단속사, 속세의 인연을 끊는다 했으니, 정토淨土의 세계를 지향했을까? 속세의 인연이 끝난 길에서 새로운 세상, 부처의 세계가 펼쳐진다. 하지만 인연이 끊자고 끊어지는 것이 아니지 않은가.’라고 했다.

아마도 선생은 단속사에 자주 간 것 같다. 정당매政堂梅를 풍자한 시가 있고 사명당에게 써준 시도 있다. 백운동에는 <유두류록>에는 한번 갔다고 되어 있지만, 뒤에 사람은 3번 갔다고 했고, 산수가 아름다워 친구나 제자들과 자주 갔을 것으로 추측한다. 백운동은 남명 선생과 후세에 매우 깊은 관계가 있으므로 기회 되면 다시 이야기하려 한다. ‘유 백운동’ 시가 있고, 많은 후학이 ‘도구대’와 백운동을 덕산을 들어가는 초입으로 중시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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