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8) 산청에 남은 남명 선생 자취를 찾아

산청시대 2021-12-29 (수) 23:49 2년전 15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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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천재서 바라본 지리산 천왕봉과 한국선비문화연구원

남명 선생은 삼가에서 태어났지만, 일찍부터 두류산을 동경했다. 신안 남평 문씨 학유學諭 가용可容의 따님이 증조모이며, 선생이 삼우당 문익점 선생의 <묘사기>(廟祠記)를 지었다. 평지리 상산 김씨 단구재丹丘齋 김후金後 후손인 만호萬戶 김행金行은 선생의 사위이다. 안분당과 청향당을 일찍부터 교유했고, 그 외 많은 산청의 제자들이 산해정 혹은 뇌룡정으로 선생을 일찍 찾아 제자가 되었다. 물론 선생이 덕산으로 어주하고 나서는 산청의 자제들은 많은 사람이 제자가 되었다. 

 

삼우당 문익점 선생 <묘사기> 지은 남명

 

28세 때에 친구 성우와 지리산을 유람했다. 58세 때에 두류산의 유람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옥종면과 수곡면 사이의 덕천강 다회탄多會灘(지금의 창촌교 일대)에서 일행과 작별하고 두류산을 둘러본 것을 술회한다. 

‘내 일찍이 이 두류산에 덕산동德山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고, 청학동靑鶴洞과 신응동神凝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고, 용유동龍遊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다.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간 것이 한 번이었으며, 장항동獐項洞으로 들어간 것이 세 번이었다.’ 

덕산동은 지금의 단성면의 백운리에서부터 시천 삼장면 일대를 말하고, 백운동은 지금의 단성면 백운리이다. 장항동은 곧 삼장면 평촌리 지역의 대원사 계곡으로 들어가는 초입이다. 28세 이후 언제인지는 몰라도 산청을 자주 다녀갔음을 알 수 있다. 

 

28세 때 지리산 유람 이후 자주 다녀가

 

덕산으로 옮긴 후의 산천재 시절에는 단속사, 삼장사, 지곡사 등에서 강회를 열었다. 그 유적을 살펴본다.

안분당 권규(1496~1548)는 아버지 시득時得이 1496년 단계리에서 태어났는데 21세 때 정완(포은 정몽주의 5세손)의 딸과 결혼하고 처가인 원당동源塘洞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안분당 실기>에 의하면 산해정으로 남명 선생을 찾아가 강론했는데, ‘만 길이나 우뚝 솟은 높은 기상이 있는 학자’라고 칭찬하면서 그 이듬해 셋째 아들 권문임(1528~1580)을 남명 문하에 보냈다고 했다. 또 남명의 부친 판교공이 안분당 왕고王考(할아버지)의 묘갈명을 지어주기도 했다. 안분당이 53세를 일기로 세상을 하직하자 남명이 찾아와 곡하고 묏자리를 정할 때 선생이 직접 그 자리를 잡아주었다 한다. 안분당의 네 아들이 모두 남명 문인이다.

 

안분당 권규 네 아들 모두가 남명 문하에

 

청향당 이원(淸香堂 李源, 1501~1568)은 배양리培養里에 거주했다. 배산서원培山書院에는 청향당과 퇴계, 남명 세 선생이 나란히 모셔져 있다. 세 분은 사동지우四同之友<청향당 선생 실기>라하여, ‘동도同道, 동경同庚, 동심同心, 동덕同德. 곧, 도가 같고 나이도 마음도 같고 덕도 같았다’ 하였다. 조부 이계통李季通이 문과에 급제하고 부호군을 지냈는데 강성군 문익점(文益漸, 1329~1398)선생의 손자인 문승로文承魯의 따님과 혼인함으로써 배양리에 살게 되었다. 이 마을에 청향당이라는 정사를 짓고 처사로 생을 마쳤다. 청향당이 있었던 건물 위치는 마을 가운데 어디라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남명 선생이 지은 청향당 팔영淸香堂 八詠이 <남명집>에 남아 있다.

 

남명, 퇴계와 ‘사동지우’로 불린 청향당

 

선생이 제자들과 만날 때는 대개 산천재에서 만나고 가르치고 했지만, 특별히 많은 사람이 만날 때는 사찰에서 규모가 큰 강회를 했다. 삼장사三藏寺(三壯寺, 三莊寺), 단속사斷俗寺, 지곡사智谷寺 등이었다. 

삼장사는 삼장면 평촌리 새터 마을에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 탑이 서 있는 자리와 승탑(僧塔, 浮屠)이 서 있는 자리의 거리가 300m는 될 것 같아 사찰의 규모를 짐작할만하다. 평촌 마을에서 건너다보이는 전답과 새터 마을 전체가 절터로 여겨진다. 삼장사가 언제 지어졌다가 언제 폐사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삼장사는 산천재에서 가까우면서도 큰 절이라 여러 번 회합이 있었을 듯한데 기록이 없다. 

명암明庵 정식鄭?(1683~1746) 문집에 보면 삼장사에서 쓴 시가 3수, 대원사와 장항동을 주제로 쓴 시가 각 1수, 덕산사(德山寺)의 명옹대(明翁臺)를 새기고 쓴 시가 2수가 실려 있다. 아마도 1741년 전후일 것으로 짐작되므로 18세기까지는 존속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명암집 참조). 이 절에 관한 유래 역사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산청군 문화재 편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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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동지우가 모셔진 배산서원

 

사찰에서 큰 강회 하며 많은 사람 만나

 

<남명 선생 편년> 64세(1564)조에 보면, ‘덕계의 일기에, 7월에 성산星山에서 집으로 돌아오니, 선생이 승려에게 편지를 부쳐 삼장사로 오라고 하였다. 분부를 듣고 즉시 갔더니, 선생은 도착한 지가 이미 며칠이나 되었다. 혼미하고 게을러 깨우침을 받기에 부족한 줄을 매우 잘 알고 있었지만, 공경히 가르침을 받들어 감발感發되는 것이 실로 많았다. 문하에 들어간 지 십 년 동안 직접 배운 날은 적고 물러나 혼자 있을 때가 많아 열흘 추웠다가 하루 햇볕을 쬐는 것과 같을 뿐만이 아닌 것이 유독 한스러웠다.’라고 하였다. 

 

그때 덕계는 성균관 학유로서 성주에 있다가 내직으로 발령을 받아 11월에 서울로 가기 전 산천재로 자주 왕래하였다. 이때 산천재에서 십리 거리인 진교촌(陳橋村, 지금 덕교德橋)까지 전송을 했는데, 그곳의 정자나무를 송객정送客亭이라 불렀다. 지금은 경지가 정리되고 어느 지점을 확실히 알 수 없어 다시 적당한 장소를 물색하여 나무를 심고 정자를 지어 옛일을 기념해야 할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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