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19) 잃어버림의 자유, 그 고풍高風, 그리고 남명학파(합천의 남명 유적)

산청시대 2022-01-13 (목) 01:14 2년전 2482  

합천은 남명 선생이 태어난 곳인 토골(외토리外兎里)의 외가가 있다. 증조부 이후로 삼가의 갓골(관동冠洞)에 살았고, 선산이 지동枝洞에 있다. <남명집>이 처음 간행된 곳이 해인사이다. 그 유적지가 오죽 많겠는가? 합천, 그리고 선생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읽어야 할 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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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계 글씨

 

함벽루涵碧樓

상비남곽자(喪非南郭子) 잃은 것을 남곽자 같이 하지는 못해도,

강수묘무지(江水渺無知) 강물은 아득하여 알 수 없구나.

욕학부운사(欲學浮雲事) 뜬구름 같은 일을 배우고자 해도,

고풍유파지(高風猶破之) 높은 풍치가 오히려 깨뜨려버리네.

 

‘이 시를 알기 위해서는 <장자>莊子 ‘제물론’齊物論에 제시된 은미隱微한 이상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 사실 현실의 모순은 매우 심하고 복잡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수많은 갈래 속에서 헤매게 한다. 장자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현실적 모순들에 대한 정신적 고통을 깊이 체득하였다. 그가 현실을 벗어나고자 안간힘을 쓴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그가 일체의 인간과 사물이 모순의 존재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그는 우리에게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생사를 초월하여 스스로가 자신의 삶에 대한 참 주재자가 되기를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주재자가 있어 강제에 의해 사물을 성립시킨다는 일체의 사유를 부정한다. 이를 장자는 자연自然 또는 천연天然으로 보았던 것이다.… 하늘도 또한 스스로 있을 수 없는 것인데, 하물며 사물을 있게 할 수 있겠는가. … 현실 세계가 지니고 있는 시비를 모두 벗어나 나의 존재까지 망각한 ‘잃음〔喪〕’의 경지를 그리워하였던 것이다’(정우락, ‘다시 불어오는 높은 바람’ <남명학의 생성공간>)

 

남곽자南郭子를 부른 이유가 여기 있으며, 함벽루에 올라 아득히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면서 그 세계와 의식이 닿아 있다. 그러나 선생 자신도 부귀공명의 유혹을 받지 않았겠는가? 많은 생각 끝에 고풍高風이 와서 부숴버린다. 선생의 학문의 특이성이 여기서 나타난다. 주자학 일변도였던 당시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던 소이연을 알 수 있다. 모든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 ‘원시 유학’으로 돌아가 공자와 안자의 고풍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던 것이다.

 

합천은 뇌룡정雷龍亭이 있고, 선대 묘소가 있다. 용암서원龍巖書院이 있고, 용암서원의 구명인 회산서원晦山書院, 향천서원香川書院 구지舊址(옛터)도 답사하여 서원의 이름은 왜 바뀌었으며 왜 옮겼는가를 알고 싶다. 황계폭포黃溪瀑布가 있고, 두 분의 창화시唱和詩가 100여 편이 되었다고 하는 사미 문경충(1494~1555)의 사미정四美亭도 있다. 해인사는 ‘명주지맹冥洲之盟’(남명과 동주 성제원의 약속)과 연암 박지원의 <해인사 창수록>海印寺 唱酬錄의 사연이 있다. 

 

‘탁계 전치원濯溪 全致遠(1527~1596) 유적’, 도촌 조응인陶村 曺應仁(1556~1624)과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1583~1660)의 봉서정鳳棲亭, 그리고 무민당 박인無悶堂 朴絪(1583~1640)의 벽한정碧寒亭, 세 유적을 돌아보기로 했다.

 

합천읍에서 김종철 용암서원 원장과 김무만 향토 사학자를 만나 탁계 종손 전호열씨 댁으로 향했다. 탁계의 무이구곡가 병풍을 보았다. 전에 보았지만, 또 보니 느끼는 감회가 크다. 그의 초서는 신필神筆이다. 몇 년 전에 전호열씨로부터 ‘탁계필첩’ 복사본을 선물 받았는데, 대부분 당시唐詩를 초서로 쓴 것이었다. 

탁계 묘소는 쌍책면 건태리 매야산 8부 능선쯤에서 황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산소 곁에 있는 퇴락한 묘각墓閣의 이름은 와유정臥遊亭이다. 52세(1578)에 춘강정春江亭을 지어 공부하던 곳인데 그의 손자 형滎이 와유정으로 고쳐 불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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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서원 

 

16세(1542)에 황강을 찾아 배웠고, 30세(1556)에 남명선생을 뇌룡사로 찾아 배웠다. 황강과 남명의 묘비에 글씨를 썼다. 66세에 임란이 일어나 아들 우雨와 조카 제霽를 불러 같이 창의하여 공을 세웠다. 38세(1564)에 황강 선생을 위하여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세웠는데 뒤에 탁계 자신과 이대기(1551~1628)가 배향되었다. 아들 수족당 전우, 손자 두암 전형 3대가 모두 명필이었다. 청계서원 뒤의 군립공원인 재티 못가에 있는 탁계의 부모 묘소도 둘러 보았다. 

 

도촌 후손 전 대종회 운영 위원장 조영기 씨를 만나 곧장 봉서정으로 향했다. 

봉서정은 오계 조정립梧溪 曺挺立(1583~1660)이 정주定州 목사와 대사간을 역임 후 향리로 돌아와 창건한 재실이다. ‘도촌별묘’陶村別廟에는 도촌 오계 부자분을 모셨는데, 원래 봉산면 김봉리에 있었다가 합천댐 수몰로 지금의 봉산면 압곡리로 모두 옮겨 세웠다(경남도 문화재 235호). 

 

이 집안은 창녕 조씨 송군松君의 6세손 고려 태복경太僕卿 흥興을 중조로 하는 태복경공파로 부른다. 봉산, 묘산면 일대에 후손들이 주로 산다. 도촌의 아버지는 휘 몽길夢吉인데 증직으로 통정대부 좌승지이고 어머니는 평산 신씨로 송계 신계성(1499~1562)의 따님이다. 서계 김담수(1535~1603), 한강 정구(1543~1620)와 내암 정인홍(1535~1623)에게 수학하였다. 유일로 천거되어 왕자사부를 거쳐 산음현감 및 여러 고을을 맡아 선정을 폈다. 대구 부사를 끝으로 고향에 돌아왔다. 훌륭한 목민관으로 유명하고 임란에 창의하여 항복한 왜인들을 잘 위무하여 싸우게 했다. 

아들 조정립은 1609년 문과에 급제하여 학유, 정언, 지평등 청요직을 거쳐 목민관을 지냈다. 인조반정 시기에는 귀양을 가기도 했다. 병자호란에 의병을 일으켰다, 정주 목사를 끝으로 귀향하여 봉서정을 금봉천金鳳川 상류에 짓고 후학을 양성하고 친구와 교유하며 지냈다.

그러나 인조반정(계해정변)을 거치면서 남명학파의 대부분인 북인은 몰락했고 일부는 남인과 서인으로 당색을 바꾸어 명맥을 유지했다. 1631(인조9)년 합천, 거창, 성주, 고령, 영천, 예산 등지의 북인 잔당이라 할 수 있는 사람들의 소위 ‘광해군 복위운동’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귀양 가고 재산은 적몰 되었다(조찬용, 1728년 무신봉기와 300년 차별). 

 

한 많은 봉서정을 나와 용주면 손목(손항巽項) 마을로 향했다. 많은 후손들이 나와서 환대해 주었다. 이 일로 무민당 후손의 문장 격인 박천석(89)씨가 덕천서원 2021년 추향 초헌관으로 추대되었다. 이곳은 무민당이 <남명년보>南冥年譜, <언행총록>言行總錄, <산해사우연원록>山海師友淵源錄을 편찬한 곳이다. 무민당 57세(1639)에 건립했다(지방문화재 533호). 

 

이에 앞서 <언행록> 등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자. 

‘우리 고장의 선생인 래복재來復齋 하공河公(각재 하항)께서는 남명 만년의 고제로서, 가르침을 받은 지 십여 년에 칠십 자(七十 子)가 선성先聖(공자孔子)을 복응服膺한 것과 거의 같았다. 무릇 귀와 눈으로 얻은 바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라도 빠뜨리는 바 없이 남김없이 기록해 넣어 <언행록>言行錄이라 이름하였으니, 조曺선생의 사람됨을 분명하게 그려 넣었다. 게다가 그 대요大要를 간추려서 유사遺事 한 편編을 만들어, 제사祭祀에 못다 한 사모의 마음을 넓혔다. 또한, 사우연원師友淵源에 관계되는 이들을 기록해 따로 한 책을 만들었다.…그러나 마침내 병화兵火로 잃고 말았으니 애석한 일이다’(겸재집, 오이환. 남명학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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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서정 

 

여러 문인들이 집필했던 것이 선생의 수고手稿와 함께 서원과 더불어 재로 변했을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이와 훨씬 앞의 황강 이희안의 연보 및 언행총록, 청향당 이원의 연보에 ‘중종 25년 4월 남명이 산해정을 낙성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송계 신계성, 대곡 성운과 원근의 선비들이 모여 <산해연원록>을 찬수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오이환, 전게서). 등의 기록이 있지만, 그 실체가 없었다. 

 

이래서 무민당의 사업이 추진된다. 

‘제가 수년 전에 덕산에 들어가 조산인曺山人(모정 조차마慕亭 曺次磨, 1557~1639, 남명 선생 제2자)을 뵈었더니, 개인적으로 기록해둔 작은 책자 두 권을 내게 보이셨는데, 그중 하나는 <사우록>이요 또 하나는 <연보> 초본이었습니다. 내가 말하기를 ‘노선생老先生 당시 사우의 성대함은 아마 우리 동방에 견줄만한 경우가 드물 것입니다. 만약 <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주희가 이학의 연원과 역사를 기록한 책)의 예에 따라, 그 행장行狀, 묘지墓誌, 유사遺事와 벗들 사이 서술 등의 말을…’(무민당이 강재 성호정에게 보낸 편지, 부분. 오이환 <남명학파의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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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한정 

 

당시 조모정이 이미 소략한 형태의 사우록과 연보의 사록을 각 한 책씩 만들어, 이를 수정 보완하고자 강재 성호정 및 겸재 하홍도에게 위촉한 바 있으나, 강재의 질병과 겸재의 고사로 이루지 못하다가 결국 무민당이 맡아 3년의 세월을 거쳐 77세의 고령에 탈고한 것이다. 남명학파의 중심인물이었던 내암 정인홍이 적신으로 몰리는 현실에서 무민당을 중심으로 한 여러분의 노력을 나는 잊을 수 없다.

 

또한, 무민당이 조모정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그의 생각을 볼 수 있다. 

‘아, 돌덩이 하나가 넘어지고 세워지는 것이 남명선생께는 아무런 손익이 없음이 분명하지만, 학파의 흥망성쇠가 반드시 여기에 달려 있지 않다고는 볼 수 없습니다. 매번 한밤중에 생각이 들 때면 가슴을 치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선생의 피를 받은 자식에게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습니까?… 먹어도 목구멍을 내려가지 않고 누워도 베개가 편안하지 않습니다’(구진성, ‘인조반정 직후의 남명학파 동향’) 

 

격앙된 어조로, 정인홍이 찬한 신도비가 넘어지고 남명선생 신도비가 세워지지 않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표현하고 있음을 본다. 이에 나는 그 후손을 2021년 추향에 초헌관으로 초대하여 선생의 신위 앞에 절하게 하니 조금 위로되는 듯하다. 발길 닿는 곳마다 선생과 남명학파의 일은 많은 사연과 한이 남는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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