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학파 비극이 숨겨져 있는 ‘쌍계창수’雙溪唱酬

산청시대 2022-01-27 (목) 21:27 2년전 1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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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현 창수유적비

◇18현 쌍계 창수유적비(唱酬遺蹟碑)

‘쌍계창수는 쌍계사에 선비들이 모여서 창수한 시를 말한다. 쌍계사는 주지하듯이 하동군 화개면에 있으며, 고운 최치원이 짓고 쓴 진감선사비眞鑑禪師碑가 있어서 유명하기도 하고 팔영루八詠樓(진감선사가 섬진강에 뛰어노는 물고기를 보고 팔음률로서 ‘어산’魚山을 작곡했다고 하여 팔영루라 한다. 필자 주), 최초로 차를 심은 곳, ‘녹경’鹿脛(노루 정강이 남명선생의 <유두류록>에 보임. 필자 주) 같은 필획으로 알려진 ‘쌍계석문’雙溪石門이라는 글자가 있어서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쌍계창수에 참여한 인물이 18인이라 하여 1997년에 <18선생 행장록>(十八先生 行狀錄)이란 책이 간행되었다.…’(이상필 <전게서>) 

 

‘쌍계사에서 18현 선생님들이 뜻이 같고 도덕이 합치되어 한 모임을 이루니 당시에 성대한 모임이라 했을 것은 틀림이 없다. …문헌이 소실되어 확연히 알 수는 없지만 여러 기록을 상고해 보건대 1610년 전후가 아니겠는가 하고 추정하고 있다.’(하상대 <18선생 사적록>十八先生事蹟錄)

 

그러나 이상필 교수의 의견은 다르다. 

‘필자도 쌍계사를 지나면서 이 비석을 본 적이 있다. 그때, 무려 53세의 나이 차가 있는 인물끼리 한 자리에서 시를 창수하였다는 것은 참으로 흥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호 오장(1565~1617)은 1610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줄곧 서울에서 사환仕宦 하다가 1615년에는 동계 정온(1569~1641)을 신구伸救하는 상소로 인해 토산으로 유배당하여 1617년에 귀양지에서 타계하였으므로, 적어도 1610년 이전에 이일이 있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추담 정위(1599~1657)는 그때 나이가 12세에 불과하니,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한 적이 있다.’(이상필 <전게서>)

 

이상필 교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여러 자료를 찾아보았다고 한다. 1744년에 간행된 <간송집>, 1751년에 간행된 <겸재집>, 1780년에 간행된 <조은집>, 1781년에 완성된 <사호집>, 1785년에 간행된 <부사집> 등 5곳에는, ‘쌍계창수’라는 시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다가 1799년에 간행된 <능허집>에 ‘쌍계창수’라는 시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해 그 뒤에 간행된 동계집, 노파집, 임곡집, 매촌고, 동산집, 허창주집, 강재유고, 간송속집, 하창주집, 매죽헌고, 추담집, 송대집 등 13곳에 빠짐없이 이 시가 실려있다고 했다. 

 

이 18현의 창수 사실을 규명하기 위해 이상필 교수의 논문을 다음에 인용한다.

‘박민의 <능허집>에서 처음 보이는 ‘쌍계창수’ 시가 1616년 유람 시時의 이들 기록에는 전혀 언급된 적이 없다. 이 유람에서 팔선八仙이 창수한 시를 가지고 후일 나머지 인물들로부터 차운을 받은 것이라면 그럴법하지만, 이 여덟 사람조차도 이때의 유람에서 ‘쌍계창수’의 시를 남겼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확인되지 않는다. …한몽삼의 <조은집>에 ‘쌍계창수’란 제목으로 14인이 함께 창수했다는 기록이 <능허집>의 기록으로 발전한 것이 아닌가 의심해본다. <조은집>에는 칠언절구인데 <능허집>이후로 ‘쌍계창수’는 모두 오언절구이다. 그렇다면 그 형태만 벤치마킹한 것인지도 모른다.’ 

 

김익재는 내암 관련 인물들의 문집 간행 과정에서, 무신란戊申亂 일주갑一周甲이 되는 1788년 무신년을 맞이하여 정조正祖가 지시한 획기적인 포상정책 등과 같은 사업이 추진되면서 문집 내용에 변개變改가 일어났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조은집>과 <능허집>도 내암 관련 기록을 변개 했음을 논급하였다. 

‘1780년에 간행된 <조은집>에서 출발하여 1799년에 간행된 <능허집>에서 완성되는 이 ‘쌍계창수’는, 한편으로 내암이 길인吉人이 아니라는 사실을 미리 알아 절교했다는 등의 내용을 문집의 다른 곳에서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그런 인식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결속을 다졌음을 보여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그러므로 적어도 18현 가운데는 내암과 전혀 상관없는 인물은 없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쌍계창수’의 출현도 정인홍 문인의 후예들이 정인홍의 흔적을 부정하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고, 그래서 결국 비슷한 처지에 있는 집안의 후예들이 모여서 세강계世講契를 조직하기에 이른 것이다. …조식(曺植)을 추숭하려다 죽음에까지 이른 정인홍을 철저히 숨기려 했다는 점은 참으로 아이러니라 할 것이다. 이것이 남명학파의 비극이었다.’라고 그는 결론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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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옥대 24현 장구지소               공옥대 24현 창수 기념비​           공옥루​

 

18현은 다음과 같다.

부사 성여신(浮査 成汝信, 1546~1632 남명 문인, 내암 종유, 구동 거주)

노파 이흘(蘆坡 李屹, 1557~1627 입재 내암 문인, 삼가 거주)

창주 하증(滄洲 河증, 1563~1624 내암 한강 문인, 단목 거주)

사호 오장(思湖 吳長, 1565~1617 내암 한강 문인, 산음 거주)

능허 박민(凌虛 朴敏, 1566~1630 내암 한강 문인, 나동 거주)

봉강 조겸(鳳岡 趙?, 1569~1652 부사 문인, 봉강 거주)

매죽헌 성박(梅竹 軒成?,1571~1618 부사 장자, 구동 거주)

동계 권도(東溪 權濤, 1575~1644 한강 문인 단계 거주)

매촌 문홍운(梅村 文弘運, 1577~1640 내암 문인, 가방 거주)

송대 하선(松臺 河璿, 1583~1652 송정 조카, 수곡 거주)

동산 권극량(東山 權克亮, 1584~1631 한강 여헌 문인, 단계 거주)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 1585~1664 노파 여헌 문인, 함안 거주)

임곡 임진부(林谷 林眞?, 1586~1657 노파 문인, 삼가 거주)

창주 허돈(滄洲 許燉, 1586~1632 노파 문인, 삼가 거주) 

조은 한몽삼(釣隱 韓夢參, 1589~1662 황암 여헌 문인, 정수 거주)

강재 성호정(疆齋 成好正, 1589~1539 내암 문인, 함안 거주)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 1593~1666 송정 문인, 안계 거주)

추담 정외(秋潭 鄭?, 1599~1657 남명 손서, 진주 거주)

 

‘공옥대’는 1585년에 수계한 사실이 송정 하수일의 기문에 의해서 확실한 전거가 나타나 있지만, ‘쌍계창수’는 대략 1610년(하상대 <18선생 사적록>), 1616년(능허집 연보), 1620년(가호세고의 <매촌고>) 등에 신빙성이 낮은 기록이 있지만, 그 실체가 모호하다. 공옥대는 ‘공옥대 보존회’가 잘 보존 관리하고 있고, ‘쌍계창수’는 1966년 11월에 후손들이 ‘세강계’世講契를 만들어 1972년에 쌍계사 입구에 ‘18현 창수유적비’를 세웠다. 지난날을 회고해 보면 가슴 아픈 감회를 억누를 수가 없다.

 

조종명 /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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