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0) ‘아름다운 경치는 그 사람을 만나야 드러난다’

산청시대 2022-01-27 (목) 21:33 2년전 15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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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옥대拱玉臺

하동군 옥종면 병천리, 가덕 마을 앞에 난산(卵山, 달걀 모양의 산, 독뫼 혹은 똥메라 부르기도 함)이라고 하는 조그만 산이 들 가운데 작은 시냇물을 옆에 끼고 우뚝 서 있다. 전에는 고색창연한 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져 있었는데 거의 병들어 베어내고 산죽이 무성한 산에 소나무는 띄엄띄엄 서 있다. 이곳이 ‘공옥대’다. 마치 옥구슬을 받치고 있는 듯하다. 멀리 옥종면의 주산인 옥산玉山을 읍하고 있는 듯해서 이름했다 하기도 한다. 

 

송정 하수일(1553~1612)의 기문에 의하면 ‘…하루는 우리 내복 숙부來復 叔父(각재 하항 또는 내복재 하항, 1538~1590을 말함, 송정의 당숙부, <필자 주>)께서 그 아래로 지나다가 비로소 특이하게 여겨 풀숲을 헤치고 올라가니 그 자리가 과연 승지勝地였다. …금년 9월에 나의 벗 강군姜君 경윤景允이 여러 벗들과 마을 사람들에게 두루 알리어 힘을 모아 덤불을 제거하고 석담을 쌓았으니 단번에 대臺가 완성되었다. 넓이는 대청만 하고 숫돌처럼 평탄하여 삼십 명이 앉을 만하였다. 인하여 공옥대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옥산을 받들고 있기 때문이다. 동으로는 조계潮溪(덕천강)를 굽어보고 북으로는 방장산方丈山을 바라보며 남으로는 부소산扶蘇山이 받치고 있다. 또 작은 개울이 서북에서 발원하여 출렁거리며 그 아래로 흘러가니 일대의 경치가 이에 가장 아름답다. …중양절이 지난 육일에 경윤景允이 그 경치를 구경하고자 청하였는데 기약하고 모인 이가 10인이고 기약 없이 모인 이가 12인이었다.’라고 하였다. 당일에 모인 분은 이십 이인이었던 것 같고, 어느 땐가 두 분이 추가로 입계한 것 같다.

 

하증의 <연보>에는 23세 때인 을유(1585)년에 공옥대에서 수계 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때 함께 수계한 인물은 하락(환성재 1530~1592, 수곡 거주, 남명 문인 각재형 거의擧義), 손천우(무송재 1533~1594 수곡, 남명 문인), 하항(각재 1538~1590 수곡, 남명 문인), 김대명(백암 1536~1593 묵계, 남명 문인, 거의), 이정(모촌 1541~1613 원당 남명 문인, 거의), 최기필(모산 1562~1593 북천, 거의), 하응도(영무성 1540~1610 남명 문인), 조겸(봉강 1569~1652 진주, 조지서 증손), 유종지(조계 1546~1589 수곡, 남명 문인), 정승훈(매죽당 1552~1633 거의), 양응룡(1567~? 운곡), 유만영(호군 ?~?), 문할(성광 1563~1598 거의, 옥동玉洞의 자), 하수일(송정 1553~1612 수곡, 각재 문인), 이유함(오월당 1557~1609 단성 수우당 각재 문인), 정담수(죽헌 ?~?), 강경윤(모옥 1547~?), 양개(1566~1593 옥종, 남명 문인, 거의), 정대순(1552~1630 옥종, 거의), 이순훈(남계 1569~?), 한계(봉사 1548~1603 정수, 거의, 한몽삼 부), 오장(사호 1565~1617 산청, 거의, 덕계 오건의 자), 조차마(모정 1557~1639 덕산, 남명 중자)등 23인이라고 되어 있어 본인(하증, 창주 1563~1624 단목)을 합하면 24현임을 알 수 있다. 

 

‘당시 수계 했다고 하는 23(24 필자 주)인의 면면을 보면, 대체로 진주의 서쪽 지역에 거주했던 인물이다. 이 인물들 가운데 생몰년이 밝혀진 인물로서 당시에 가장 젊은 사람은 17세인 조겸이고 그 다음이 21세인 오장이다. 당시 진주 동쪽에 있었던 조식 문인 수우당 최영경과 부사 성여신이 빠져 있을 뿐 남명학파의 주요 인물들이 거의 망라되어 있다고 할 만하다. 

이 모임이 진주 지역 남명학파의 결속에 일정한 영향을 끼친 것은 틀림없겠지만 이 모임에 결과되어 나타나는 다른 형태의 특별한 일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1585년은 덕천서원이 건립된 지 10년째 되는 해이고 당시 아직 사액을 받지 못한 형편이니, 학파의 내부적 결속이 무엇보다 요구되는 때이기도 하다.’(이상필 <창주 하증의 생애와 남명학파 내에서의 역할>)

 

1999년 봄 어느 날 진주성 충의당(진양 하씨 고려 충신 하공진(?~1011)을 모신 경절사의 서재)으로 만회 하영복 옹이 나를 불러 “공옥대가 황폐되어 있는데 보수하는 사업을 이루어야 하지 않겠는가?” 했다. 과연 이분이 말로만 듣던 송정공의 후손 만회 어른이구나 하는 반가움에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24현의 얼이 스며있고, 지팡이와 신발이 머물던 공옥대는 병화와 시대의 변화로 유풍은 이어지지 못하고, 불모지로 변하고 있는 것을 개탄스럽고 애석하게 여긴 송정 선생의 후손 만회 하영복 옹께서 공옥대를 보존 관리해야 한다고 1999년 초에 24현 문중 대표들을 진주시 남성동 성지 내 충의당으로 초청하여 모임을 갖고 공옥대 보존회를 취회聚會할 것을 논정하자 참석한 자 전원 일치된 의견으로 본회를 취회하기로 결론을 내리고, 한선우, 하오봉, 손성모, 하태현, 이완규, 하상대, 하병인, 조종명 등이 발기를 했다. …회장 한선우, 부회장 양규환, 하태현, 감사 손성모, 총무 하상대가 임원으로 선출되었다.’(하상대, <공옥대> 2018) 

 

그리하여 1999년에 24현의 후손들이 힘을 모은 공옥대 보존회는 ‘공옥대 24현 창수 기념비’ 拱玉臺 24賢 唱酬記念碑(최인찬 찬撰, 손원모 서書)를 세웠다. 2010년에는 <24현 유현록儒賢錄>을 발간하고 2014년 4월 16일 ‘공옥루’拱玉樓를 낙성했다. 매년 음력 4월 16일에 계회를 하고 여러 가지 보존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남아있는 공옥대 전승 기록을 보면, ‘병자(1936년) 시월 상사일, 공옥대 계안拱玉臺 契案’이 있다. 이렇게 이어오다가 어느 해인가 휴계 되었다가 정미(1967)년에 ‘공옥대 계보수 취지서’(拱玉臺 契補修 趣旨書)를 내고 기금을 모은 기록이 보인다. 1993년까지 관리한 기록이 있고 다시 휴계 되었던 것 같다.

 

창수 기념비는 서 있지만 창수록이 전해오는 것은 없다. 24현 대부분이 임란을 맞아 거의擧義 했다. 아마도 공옥대에 모여서, 남명학의 계승, 나라에 대한 걱정, 임란의 극복책을 등을 의논했을까? 정대순은 모촌 이정의 의려를 지원하기 위해 군량미와 장정을 모아 보냈다는 것을 옥봉의 문집에서 본 적이 있다. 음풍농월吟風弄月로 세월을 보낼 어른들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아! 아름다운 경치는 저절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만나야 드러난다고 했으니 참으로 명언이다.’ 

이 말은 송정 하수일(1553~1612)이 선조 기축년 9월에 쓴 공옥대 기문에서 한 말이다. 일은 사람이 꾀하고 이루는 것이며, 먼 선현의 위업도 어진 후손이 그 뜻을 계승 발전시키지 않으면 인멸되고 마는 것이니 만회공의 뜻은 마침내 호응을 얻어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런 문화유적의 보존과 관리는 후손에게만 맡길 일이 아니다. 민족적 문화유산으로 자치단체와 민간이 협력해서 계승 발전시켜 가야 할 것이다. 24현의 관련 창수 시는 난중에 일실되어 보이지 않다가 19세기 들어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성암 양개의 후손 회곡 양주희의 시 한 편을 보자.

 

‘공옥대’拱玉臺 (양주희梁柱熙(1856~1901) <회곡집>晦谷集)

突然起平野(돌연기평야) 우뚝하게 넓은 들에 서 있으니,

臺高四望同(대고사망동) 대가 높아 사방이 다 보이네.

先賢修契地(선현수계지) 선현들이 수계하던 곳이,

百載起淸風(백재기청풍) 영원토록 맑은 풍치 일어나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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