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1) 남명 선생 발길 깃든 오대사(五臺寺)를 찾아

산청시대 2022-02-17 (목) 10:15 2년전 14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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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 전경
 

지리산 세석평전이 동남쪽으로 뻗어내리다가 한번 솟구쳐 삼신봉(1,284m)이 된다. 다시 하동군과 산청군의 경계를 이루며 더 내려가다가 우뚝 솟은 봉우리가 오대 주산(831m)이다. 오대사 터를 찾아 나섰다. 덕천서원에서 중산리 방향으로 2km 정도 가면 외공마을이 나온다. 이 마을에서 건너다보면 내공리의 뒤로 우뚝 선 산이 오대 주산이다. 오대사 터로 가려면 내공마을 뒤로 갈티재를 넘어야 한다.

 

‘오대사, 오대산에 있다. 살천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다섯 봉우리가 줄지어 서 있는데, 그 형세가 돈대처럼 생겼다. 오대사는 수정사라고도 하는데, 고니 알만한 구슬이 있어서 여의주라고도 불렀다. 은실로 묶어 보물로 전해져 내려왔다. 오대사 승려의 말로는 물이 반 정도 담긴 동이에 구슬을 담그면 물이 즉시 넘친다고 한다. 오대사 뒤편에는 국가 소유의 대밭이 있다.’ (<진양지>, <두류전지>(頭流全志) 김선신(1775~?) 불교 사찰 총표 조)

 

오대사 터는 남명학 연구자들이 많이 다녀왔다. 남명 선생은 아마도 이 근처를 자주 찾았을 것이다. 자료를 찾기 위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지리산 둘레길’ 답사를 하는 거의 모든 사람이 ‘남명 선생이 자주 다녔던…’이라고 쓰고 있다. 아마도 생각보다는 많은 사람이 ‘오대사’와 남명 선생을 관련지어서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방은 조온환 옹과 한번 갔다가 못 찾고 돌아오고, 정우락 교수의 <남명학의 생성공간>을 읽고, 그 절터에는 사단법인 세계 국선도 연맹에서 관리하는 ‘백궁선원’이 있고, 하동군 옥종면 궁항리 346번지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뒤에 들으니 이상필, 최석기, 오이환, 김윤수 등 남명학 연구자 여러분이 벌써 다녀온 것을 알았다. 지난해 12월 어느 날 나는 변명섭 씨와 함께 오대사지를 찾아 나섰다. 그러나 백궁선원은 없어지고 사유지로 팔렸다는 이웃 마을 주민의 말을 듣고 현장에 갔더니 높은 대나무 울타리가 쳐진 곳에 개 짖는 소리만 요란했다. 인기척을 느끼고 큰소리로 방문을 요청했으나 절대로 들어갈 수 없다는 말만 듣고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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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사가 나타난 옛 지도 

 

남명학 연구원장을 지낸 중천 김충렬(1931~2008)은 선생의 학문 성격을 ‘회확회통적’(恢廓會通的)이라고 표현했다. ‘넓고 크게 두루 통한 학문’이라는 뜻이리라. 

‘…남명학은 성리학의 구조를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그 구조에 담긴 정신은 원시유학原始儒學이다. 그리고 주자朱子의 철학을 학문 방법으로 계승하고 있으면서도 그 틀에 얽매이지 않고 모든 학설을 취사선택해서 보다 정체적整體的인 체계를 구성하고 있어, 자못 그 도량이 화확소통적恢廓疏通的이며 회통집약적會通集約的이다.… 또한 남명은 유가儒家 안에서만 학파를 초월한 회통을 꾀한 것이 아니라 도·불道佛이라도 진리에 합당하다고 판단되면 가리지 않고 수용해서 학설을 보완했다.’ (<남명학의 회확회통적 성격과 유교유신儒敎維新> 김충렬 1995) 따라서 불교설을 더러 인용했고, 승려와 도가와도 자주 접촉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오대사는 여가가 있을 때 자주 다녔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는 시가 있다. 따라서 그 절의 스님도 자주 찾아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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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사지 중형부도 

 

증오대승(贈五臺僧) 오대사 스님에게 줌

산하고촌초엄문(山下孤村草掩門) 산 아래 외로운 마을 풀이 문을 가렸는데,

상인래방일초혼(上人來訪日初昏) 스님이 날 저물고자 할 때 찾아왔구나.

수회설파잉무매(愁懷說罷仍無寐) 시름을 다 이야기하고 잠 못 이루는데,

월만전계야욕분(月滿前溪夜欲分) 달빛은 앞 시내에 가득하고 밤은 깊어가네.

 

산 아래에 있는 외로운 마을, 풀이 문 앞을 가득 덮고 있다. 날이 저물어 갈 때 오대사의 스님이 찾아왔다. 그 스님과 시름 가득한 마음을 나눈다. 남명 자신의 시름과 스님의 시름을 공유한 사이다. 그러나 시름을 모두 이야기했다고 해서 시름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밖을 나와 보니 달빛은 집 앞의 시내에 가득하고 밤은 이슥해 있었다. 오대사의 스님과 이렇게 마음속에 있는 시름을 나눌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시가 언제 지어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1561년에는 산천재를 지었고 내로라하는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1566년에는 사정전思政殿에서 명종을 독대했다. 1567년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즉위하여 그해 11월과 12월에 연달아 교지를 내려 불렀으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고 나가지 않았다. 

 

67년에 올린 정묘사직정승정원장丁卯辭職呈承政院狀(정묘년에 사직하면서 승정원에 올린 상소문)에 보면, 

‘…나라의 근본은 쪼개지고 무너져서 물이 끓듯 불이 타듯 하고, 신하들은 거칠고 게을러서 시동尸童 같고 허수아비 같습니다. 기강은 씻어버린 듯 말끔히 없어졌고, 원기元氣가 완전히 위축되었으며, 예의가 온통 쓸어버린 듯 없어졌고, 형정刑政이 온통 어지러워졌습니다. 선비의 습속이 온통 허물어졌고, 공정한 도리가 온통 없어졌으며, 사람을 쓰고 버리는 것이 온통 혼란스럽고, 기근이 계속 되풀이되고 있습니다. 또한 창고는 온통 고갈되었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온통 더럽혀졌으며, 세금과 공물貢物을 멋대로 걷고, 국방은 허술할 대로 허술합니다. 뇌물을 주고받음이 극도에 달했고, …오랑캐들이 업신여겨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온갖 병통이 급하게 되어 하늘의 뜻과 사람의 일도 예측할 길이 없습니다.’

이와 같은 깊은 나라 걱정이 있었다. 또한 여러 친구가 연달아 세상을 떠나는 일 등 시름이 한이 없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로 밤이 깊었을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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