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인의 산청골 이야기(4) 성철스님 순례길 따라가다
생비량을 흐르는 양천 물길은 신등천과 만나 문대, 청현, 신기 들판으로 흘러 어느덧 경호강과 만나는 두물머리, 원지 둔치에 닿는다. 양천강 하구를 가로질러 놓인 잠수교를 건너면서 구도자의 길은 시작된다. 이 길은 신안면 소재지 건너편 엄혜산을 끼고 경호강을 따라 내려간다. 엄혜산에서 성철스님 생가인 겁외사까지 2.3km로 걸어서 30분 거리다. 엄혜산 높이는 226.2m로 그리 높은 편이 아닌데도 산 위에 오르면 전망이 시원스럽게 툭 틔었고 경치 또한 수려하다. 절벽 아래 경호강에는 여울진 곳이 많아 ‘엄혜칠리탄’(嚴惠七里灘)이라 부른 기록도 있다.
경호강 경호강 여울진 곳 많아 ‘엄혜칠리탄’ 엄혜산 중턱 법륜암을 지나 500m 정도 더 내려가면 쉬었다 갈 수 있는 공간이 보인다. 여기서 고개를 들어 암벽을 올려다보면 5m 정도 높이에 새겨 놓은 붉은색 환구정(喚鷗汀) 각자를 볼 수 있다. 이 글씨는 혜산(惠山) 이상규(李祥奎, 1847-1923)가 1906년에 새겼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에 침탈당하자 그 상실감을 달리 풀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배회하다 경호강에 떠 있는 흰 물새들의 깨끗한 자태를 바라보며 저 새들처럼 자신도 번뇌를 훌훌 털고 초월의 삶을 갈구하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새에게 길을 물은 혜산 이상규 <혜산집> ‘환구정기’를 살펴보면 전반부는 이곳을 자주 찾아 익숙해진 강과 새를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어지는 후반부에서는 강에서 노니는 물새를 통해 철학적 사유를 담았다.
학이재(學而齋) 세우고 강학 주도 혜산 이상규는 1846년 고성 무양리에서 태어나 1880년에 친척들을 모두 데리고 단성 묵곡으로 거처를 옮겨 한 마을을 이루어 화목하게 지냈다. 마을에는 지금은 함안 이씨들의 재실로 사용하고 있는 학이재(學而齋)를 세웠다. 혜산이 학이재에서 강학을 주도했으며, 인근 선비들과 폭넓은 교류를 하며 학문에도 힘썼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묵곡(묵실)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경호강 충적지에 자리 잡아 먹거리가 풍부하여 안락한 생활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예전에는 묵실을 밤, 대나무, 누에가 각각 천 냥씩 수입을 올리는 삼천 냥의 마을이라 불렀다.
성철스님은 1912년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났다. 1936년 25세에 하동산(河東山, 1890-1965) 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받고 출가했다. 1980년 70세에 조계종 제6대 종정에 추대되었으나 취임 법회에는 나가지 않고, 종정 수락 법어에서 “아아, 시회대중(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화두를 던졌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생가터에 추모 공간인 ‘겁외사’를 건립했다. 그래서인지 겁외사는 일반적인 사찰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 지난해 11월 석조 사면불 점안 봉행 지난해 11월 6일 겁외사 입구 오른쪽 도로변에 석조 사면불을 세우고 점안식을 거행했다. 석조 사면불은 너비 3.8m, 높이 6.1m의 입상 형태로 남과 북, 영호남의 화합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동쪽에는 중생들의 모든 질병을 고쳐주며 재난에서 벗어나게 하고 음식과 옷을 제공한다는 약사불이다. 서쪽은 이 세상이 서방정토 극락세계가 되어 걱정과 고통에서 벗어나도록 도와주는 아미타불이다. 남쪽은 미래 세상에도 우리를 보호하고 바른 삶을 살아가도록 인도해 주는 미륵불이며, 북쪽은 현재의 우리가 무지(無智)에서 벗어나 지혜의 삶을 살고 궁극적으로는 깨달음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석가모니불로 조성했다. 경호강변 14만2천㎡ 규모 성철 공원 참고자료 민영인 /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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