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와 학문적 성향이 달랐던 남명

산청시대 2022-04-14 (목) 11:51 5개월전 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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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6년 개암 김우굉(1524~1590)이 퇴계에게 편지를 올려 문제를 제기한다.
‘남명 선생이 우도에 계시고, 선생이 좌도에 계심은 마치 해와 달 같아서, 모두 사문斯文을 일으켜 세우는 것을 자기 소임으로 여기십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일변하여 가히 도道에 이를 수 있음은 마치 강물을 마셔 배부른 것과 같으니, 옹색한 소인이라 할지라도 말과 행실이 미덥고 분명해졌습니다. 조 선생께서는 더욱 하학을 주로 하시어, ‘학문한다는 것은 어버이를 섬기고 형을 따르는 것 밖에 있는 것이 아니므로, 만약 이것에 힘쓰지 않는다면 이는 인사人事에서 천리天理를 구하는 것이 아니어서 끝내 얻는 바가 없을 것이라’고 하시니, 한마디도 허무에 가까운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말씀하시기를 ‘노장老莊이 빌미가 되었다.’ 하시고 ‘배움이 깊지 못하다.’ 하시니, 저는 망령되이 생각건대, 학문이란 날마다 쓰는 인륜의 사이에서 벗어남이 없으며, 마음을 보존하고 성찰하여 그 일에 익숙해진 다음에야 참된 얻음이 되는 것인 줄로 압니다. 감히 묻자옵건대, 우리 학문이 이것 밖에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선생께서 함부로 헐뜯고 배척하여 이단에 비하시기에 이르렀으니, 아마도 선생의 크신 도량에 손색이 있을까 합니다. 바라건대 열어 해석하시어 자심滋甚한 의혹을 풀어주시기를 바랍니다.’(<성호사설>星湖僿說 권9, 인사문人事門, 퇴계 남명조. 오이환 <전게서> 재인용)

‘학문이란 익숙해진 다음에야 참된 얻음’

‘개암이 변호한 남명의 학문관은 바로 2년 전 남명이 퇴계에게 편지를 보내어 논한 하학下學과 상달上達의 선후 문제로서, 남명의 충고는 당시 퇴계에게 큰 충격을 주어서 기고봉奇高峰과의 논변을 속히 종결짓도록 하는데 중요한 배경이 되는 것이었다. <성호사설>에서 이 편지를 소개한 후 ‘근세의 유자들이 더러 퇴계의 평으로 말미암아 유가자류儒家者類가 아니라 곧 처사處士 가운데 협기俠氣 있는 자라고 하니, 또한 웃기는 말일 따름이다.’라는 해명을 덧붙이고 있는 바와 같이, 남명에 대한 후세의 이와 같은 비판은 그 근본적인 원인이 퇴계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오이환 <전게서>)

이상으로 오이환의 <남명학파 연구>와 그의 앞에 인용한 논문 중심으로 남명의 학문에 대한 퇴계의 비판에 관하여 이야기했다. 퇴계학파의 많은 학자가 남명 선생을 배우러 오고자 한 일이 있었지만, 그 길이 막히는 결과가 되었다고 말하는 학자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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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룡정 전경

‘남명은 퇴계의 혼연지기와는 전혀 다른 것’

성재가 남쪽 지방을 여행한 것은 향시를 치기 위한 것 외에 청향당을 만나고 남명 퇴계 양문의 여러분들을 만나는 데도 있었지만, 남명을 꼭 한번 만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성재도 과거를 쳐서 벼슬하는 것이 목표가 아니고 학문에 목표를 두었으나 ‘위로 부형이 계시기 때문에’ 생원 시험에 응했다고 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벼슬을 내려도 거부하는 남명은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었을 것이다. 남명에게서 초월지기超越之氣를 느낄 수 있었고, 퇴계가 지니고 있는 혼연지기渾然之氣와는 전혀 다른 것이었기에 놀랐다는 말을 했다.

‘혼연지기는 무엇일까? 남명의 학풍, 성격과 구분하기 위한 말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남명이 부르는 노래는 클래식이 아니고 유행가였다. 유행가는 시조를 말한다. 남명은 스스로 지은 시조를 불렀고 흥에 겨워 노래했다. 때로는 준절한 언어로 세태를 비판하기도 했다.’(정우락, <남명학의 생성공간>2014, <남명과 이야기>2007)
금계 황준량이 남명 선생을 찾았다는 기록은 없다. 금계도 선생을 한번 보고 싶었을 것이다. 퇴계는 남명에게 편지하고 답장받고 다시 퇴계가 편지하고, 다음에 남명이 편지하고 퇴계가 답장하고. 그런 후에는 의령의 처가로 오지 않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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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산서원

준절한 언어로 세태를 비판한 남명 선생

성재 일행이 뇌룡사를 떠날 때, 남명 선생은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퇴계에 이르고 싶은 말이 있네, 호남의 제생諸生이 퇴계와 더불어 성리를 논변한 설說을 보았는가? 전현前賢께서 논석論釋하신 것이 지극하고 남김이 없으며, 후생은 전현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니, 전현의 말씀을 찾아 음미하여 그것을 행하기에도 힘이 부족한 터인데, … 퇴계까지 그렇게 한다는 것이 나로서는 탐탁지 않네.’(금란수, <성재일기> 오이환 <남명학파 연구>)

퇴계, 남명 양측과 교의가 깊었던 구암 이정(1512~1571)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보냈다.
‘근자에 누가 남명 처소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호남의 기奇 사문斯文(기대승, 1527~1572)을 말함)이 일찍이 나와 더불어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논하며 서찰을 왕복한 일을 남명은 매우 옳지 않다고 하여 ‘세상을 속여 이름을 도둑질한다(기세도명欺世盜名)고 지목하기까지 했다 합니다. 이 말은 참으로 약이 되는 것이며, 매우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답이강이答李剛而’, <퇴계전서>, 오이환 <남명학파 연구>)

교류하고 싶은 사람 많아도 기회가 없어

결론을 말하자면, 퇴계와 남명은 학문적 성향이 달랐으며 제자들 가운데도 교류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음에도 기회가 주어지지 않은 듯하다. 이런 학문적 차이점이 조선 유학사에 큰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고령의 정사현과 그 부인 창녕조씨의 정려비 이야기, 윤규 월오(1500~1560)의 죽연정, 영양 채련정 시에 황준량이 차운시를 3수나 지은 이야기, 경주의 포석정에 가서 시를 지은 이유 등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다 쓰지 못하는 점이 아쉽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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