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5) 강안 또는 경북에 산재한 남명 선생의 자취(2)

산청시대 2022-04-14 (목) 11:56 1년전 1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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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난수의 고산정

20여 년 전쯤의 일이다. 경북 안동의 한 손님이 ‘남명 기념관’으로 찾아와서 그의 조상이 남명 선생에게 수학한 일을 말했다. 아직 처음 듣는 일이었다. 그분으로부터 <지령집>(芝嶺集) 복사본을 받았다.

지령芝嶺 윤의정尹義貞(1525~1612)이라는 분이 있다. <지령 선생 문집>과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예안현禮安縣에 살았던 덕산 윤씨다. <선성지>宣城誌(예안읍지)에 의하면, 관향을 파평으로 했으나 고려 태조 때 벽상공신壁上功臣 윤신달의 후손으로 윤은형이 덕산군德山君에 봉해짐으로써 덕산을 본관으로 하였다. 부친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 윤관이 예안으로부터 안동으로 이거해 왔다. 안동시 녹전면에 있었던 마곡서원(磨谷書院)에 변계손 등 7분이 제향 되었으나 서원 훼철령으로 훼철되고 복원되지 못했다.

윤의정이 남명 선생 뵙고 아들 보내 수학

문집은 10대손 윤희세가 간행했다. 이충호가 찬한 묘갈명에 의하면 ‘지령이 성주에 우거할 때 남명 선생을 뵙고 아들을 보내 수학하게 했다.’라고 되어있다. 성주는 동강, 한강 양강 선생의 출생지일 뿐 아니라, 계매 정사현(1508~1555)이 살았으므로 선생이 자주 갔다. 윤의정은 성주에 있을 때 황매산 산사에서 남명 선생을 만났던 것 같다. 아마도 선생의 인품 학문을 흠모하여 아들에게 시를 지어 보내 찾아뵙고 수학하라고 지시를 내린 것 같다.

아들 동빙에게 부친다寄子東聘(기자동빙) 금산에 있을 때에在金山時(재금산시)
황악천봉리(黃岳千峰裏) 황매산 천봉 깊은 속에,
설산옹사문(雪山擁寺門) 눈 쌓인 산이 절 문을 감쌌구나.
송이독고서(送爾讀古書) 고인의 서책을 읽으라고 너를 보내니,
심탐성현언(深探聖賢言) 성현의 말씀을 깊이 탐구하여라.
조공성근인(曺公性勤人) 조공은 성품이 성실한 분이니,
원종청강론(願從聽講論) 원컨대 좇아서 강론을 들어라.
지공이질추(只恐爾質?) 다만 너의 자질이이 거칠어서,
불능개기혼(不能開其昏) 그 혼미함을 열지 못할까 염려되는구나.
염여정익절(念汝情益切) 너를 염려하는 나의 마음 더욱 간절함이,
일일지기변(一日知幾番)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일어나는 줄 알겠느냐?

이렇게 간절한 시를 지어 공부하게 했다. 그런데 연원록은 물론 아무 데도 윤동빙이라는 이름을 찾을 수 없다. 아마도 삼가의 뇌룡사로 보내서 공부하게 했던 듯하다. (이 기사는 <지령선생 문집>芝嶺先生文集에 실려 있다. 번역은 이창호의 도움을 받았다.)

남명 선생 인품 학문을 흠모해 지은 시

다음은 퇴계 고족高足 금계 황준량(1517~1563)과 성재 금난수(1530~1604) 이야기다.
성재는 퇴계와 동향인 예안에서 태어난 퇴계의 선진 제자다. 1560년 11월 12일 길을 나섰다. 다음 해 2월에 있는 합천 향시에 응시하기 위한 길이다. 성주를 거쳐 덕계 오건, 금계 황준량을 만났다. 금계는 성주 목사, 덕계는 성주 학유學諭로 와 있었다. 이 두 사람은 ‘지동의합’志同議合(뜻이 같고 의론이 합하여) 매우 친밀히 지냈다. 1561년 정월에 단성 배양리로 남명, 퇴계의 동경同庚(동갑) 친구인 청향당 이원의 집을 방문한다. (지금 배산서원에 남명 조자南冥 曺子, 퇴계 이자退溪 李子, 청향당 이자淸香堂 李子와 죽각 이공竹閣 李公이 모셔져 있다.)

성재는 향시에 급제하고도 여러 달을 이 부근에 머물며 산수를 유람하고 약포 정탁 등 남명, 퇴계 연원의 인물들과 교유交遊하고 있었다. 전부터 친분이 두터웠던 정복시(1522~1595)는 단성에, 류척의는 삼가에서 고을살이를 하고 있으니 여행하기에 도움이 컸다. 4월 18일, 성재는 청향당 이원, 죽정 권문현, 영모암 정구, 생원 김용정과 함께 뇌룡사雷龍舍로 선생을 배알 하였다.

금계와 성재, 뇌룡사 찾아 남명 선생 배알

‘뇌룡당사(뇌룡사 : 이들의 방문 장소가, <성재일록>에는 뇌룡당사雷龍堂舍, 성재집에는 뇌룡당, <죽정실기>竹亭實記에는 기양지뇌룡정岐陽之雷龍亭 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덕산정사도 뇌룡사로 이름하였다. 오이환은 여러 가지로 전거를 조사한 후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만약 삼가의 뇌룡사라면 남명 선생은 그해 여름쯤 덕산으로 이거 했을까? : 필자 주)에 앉아서 각각 술을 마셨는데, 술기운이 무르익자 남명이 먼저 노래를 부르면서 좌중이 모두 부르도록 권하였는데, 옛노래가 아니라 모두 스스로 지은 것이었다. 언어가 준절하고 곁에 아무런 사람도 없는 듯이 하였다. 과연 이전에 듣던 바와 같았으며, 초월의 기운은 있었으나 혼연渾然한 뜻은 적었다.’(정우락, <남명과 이야기>(2007), <성재일록> 재인용)

‘퇴계는 남명을 노장위수老莊爲?(노자나 장자를 빌미로 한다), 난요이중도難要而中道(중도로 보기가 어렵다), 고항일절지사高亢一節之士(높고 뻣뻣한 한 절개가 있는 선비) 등으로 평을 한 적이 있다. 이때 금계가 ‘산림에서 책 읽는(讀書林下독서림하) 사람에 대해 지나친 말을 삼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 데 대해, ‘장차 지키는 바를 바꾸어 세속을 쫓는 폐단이 있겠다.’ 하여 주의하라고 한 바 있다.’(오이환, <남명의 유儒·도道 사상 비교연구> 남명학 연구론총1999)

남명 비판한 퇴계와 이를 문제 제기한 금계

이 문제에 관련하여 퇴계가 59세 때인 명종 14년(1559) 금계에게 다음과 같이 답서를 보낸다.
‘‘나는 화담(서경덕, 1489~1546)과 남명에 대해 모두 평소에 깊이 사모하고 있는 터이니, 어찌 감히 헐뜯어 배척하겠는가? 다만 개인적으로 좋아한다고 하여 지나치게 칭찬하고 싶지는 않으니, 그러므로 은밀한 가운데 평하여 삼가지 않고 논한 바가 있었던 것이네.…’ 즉 개인적으로는 화담, 남명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으나, 학문적으로는 그들에 대해 만족할 수가 없으며, 따라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무렵에 이미 퇴계의 비판이 문도門徒 이외의 외부 인사들에게까지 알려져 물의를 빚고 있음을 알 수가 있으며, 만약 이것이 학파 간의 분쟁으로까지 파급된다고 할지라도 자신의 뜻을 굽힐 수 없다는 뜻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오이환 <전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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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준량 금양정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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