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6) 한번 유람 내 분수에 넘친 것은 아니나(不是一遊非分事) 화림동 월연암 차남명운(花林洞 月淵岩 次南冥韻) 갈천의 시(葛川 詩) 간송 조임도(澗松 趙任道, 1585~1664)가 동계 정온(桐溪 鄭蘊, 1569~1641)에게 바친 만시挽詩다. (최석기, ‘정온의 절의정신’ <남명 조식의 후학들>2019). 동계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조정 의론이 화의和議로 결정되자 자결을 시도했다. 1938년 봄에 들것에 실려 고향으로 돌아와 ‘이름 없는 동네’(모리某里 거창군 북상면 갈천동)에 ‘모리구소’某里鳩巢(새집 같은 집)를 짓고 세상사를 단절하고 살다가 1641년에 7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병자호란 화의에 자결 시도한 동계 정온 ‘1623년 인조반정이 일어난 직후 (조정에) 복귀했지만, 그는 다시 한번 ‘비주류’의 처지가 되고 말았다. 그가 ‘정인홍의 문하’였다는 것은 당시 서인들이 주도하는 정치판에서 결코 득이 될 것이 없었다. 그는 자신이 정인홍의 제자였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았고, 정인홍에 대한 태도 역시 끝까지 정중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좁은 정치적 입지에도 불구하고 인조반정 직후의 정치판에서 반정공신들의 난맥상을 비판했다.… 1627(정묘)년과 1636(병자)년의 호란을 맞이해서도 척화파로서의 정온의 기개는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 조선군의 장기인 화포와 궁시를 이용하여 청군의 돌격전을 분쇄하자고 제의했거니와 실제 전장에서 포병과 사수를 운용하는 방식까지 구체적으로 제시했다. … 요컨대 정온은 단순히 ‘관념적인 척화파斥和派’가 아니라, ‘척화’를 실현하는데 필요한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했던 ‘실천적인 척화파’였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그의 스승 정인홍을 거쳐 남명으로부터 이어져 온 경의사상敬義思想과 실천적인 경세가經世家로서의 면모가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한명기, ‘동계 정온의 정치적 행적과 그 역사적 의의’ <남명학 연구론총> 2001) 인조반정 직후 반정공신 난맥상 비판 안의安義현은 산수가 빼어나기로 유명하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이라고 하니, 화림동花林洞, 심진동尋眞洞, 원학동猿鶴洞이다. <조선일보> 조용헌 살롱 ‘인걸과 지령’이라는 칼럼에서 ‘남덕유산에서 맥이 둘로 갈라져 한 가닥은 거망산, 황석산을 거쳐서 안의향교로, 한 가닥은 육십령과 괘관산, 대밭산을 거쳐서 광풍루와 안의면 사무소로 떨어졌다’고 한다. 안산인 지리산이 너무 커서 외지의 큰 인물이 들어온다고 하였다. 고운 최치원(857~?), 연암 박지원(1737~1805) 등이 그들이다. 안의 앞산인 골무산은 솔개가 춤을 춘다는 의미로, 솔개 같은 맹금의 기상을 타고난 사람이 많다고 한다. 맹금 기상 타고난 사람이 많은 안의현 이번 답사는 ‘안의삼동’ 원학동 동계 종택을 먼저 갔다. ‘파매’坡梅가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마침 종손인 정완수 씨를 만나 매화의 내력을 잘 들을 수가 있었다. 동계 큰아들이 용주 조경(1586~1669)에게 신도비문을 받으러 경기도 파주로 가서 6개월을 기다린 끝에 비문을 받아 왔다. 그때 선물로 받은 매화라 한다. 아직 꽃은 피지 않았으나 수세는 건강했다. 사랑의 현판에 쓰인 ‘매화옥’某華屋이라는 글씨는 이 집을 방문했던 흥선대원군의 글씨라 한다. 매梅자를 모某자로 쓰는 것은 모某가 매梅의 고자古字이기도 하지만, 모리某里 와도 관련이 있는 것 같다.
갈천 고가·첨모당 세가·서간소루·갈천서당 <남명선생 편년>南冥先生 編年(2011, 남명학 교양총서19, 장원철, 전병철 역주)의 1566년 3월 조를 보면, 그 자리에 첨모당을 나아오게 하여 말하기를, ‘자네는 총명이 남보다 뛰어나 통함이 없고자 하는데, 다만 이렇게만 해서는 옳지 않다. 요堯 임금처럼 지혜로운 분도 급선무를 우선적으로 행하였다. 군자는 능력이 많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거느릴 수 없다. 우리 유가儒家의 일은 본래 내외內外와 경중輕重의 분별이 있다. 주자朱子도 의리義理는 무궁한데 세월이 유한한 것으로 인해 마침내, 서예書藝, 초사楚辭, 병법兵法 등과 같은 것을 버리고 오로지 학문에만 뜻을 두어 여러 성현의 학설을 집대성하는 데에 이르렀으니, 어찌 후학으로서 마땅히 본받을 바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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