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7) 현대문학 작품 속에 나타난 남명 선생 모습과 끼친 정신

산청시대 2022-05-11 (수) 00:43 1년전 1900  

‘…이치理致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면 실實하면서도 자취가 없고, 사물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맡겨두면 허虛하면서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갈무리하지 않았으므로 갈무리가 된 것이며, 뜻함이 없었기 때문에 잘 갈무리된 것이니, 하늘에 갈무리하면 사물이 숨을 데도 없고 사람이 빼앗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남명집> 한훤당화병발寒暄堂?屛跋)

이 글은 한훤당 김굉필이 ‘갑자사화’로 사사 당하고 가산이 적몰됨으로 인하여 없어졌던 화병?屛(그림을 그린 병풍)이 백년 후에 그의 손자 김립(1497~1583)의 손으로 돌아왔다. 이에 남명 선생을 찾아와 그 화병의 발문을 요청하여 그 경과를 쓰게 된 것이다. 세상의 일들은 없애려고 해도 남아서 전하게 되고, 잘 보관하려 해도 없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 병풍을 보고 선생이 감회와 함께 쓴 것이다.

남명 선생은 저술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고매한 이론을 논변하기도 좋아하지 않았다. 선생은 “나는 공자를 배우고자 한다”라고 했다. 공자는 <논어> ‘술이’편에서 ‘술이부작 신이호고’述而不作 信而好古(있는 그대로 기술할 뿐 지어내지 않고, 옛것을 믿고 좋아한다)는 말을 했다. 공자 같은 성인으로도 옛것을 믿는 신념과 그것을 충실히 설명해 전하는 것으로 사명을 삼은 것이다. ‘병풍’ 하나라도 ‘하늘에 갈무리’하여 본래의 주인에게 돌아오는 이치와 그 기쁨으로 주인에게 돌아온 뜻을 병풍에다 써준 것이니 잃었던 물건이 다시 주인에게로 돌아올 수 있었던 일의 이치를 풀어 준 것이다. 구태여 저술하지 않아도 후세 문학가로 하여금 그 정신이 드러나게 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증적인 자료를 통한 연구보다, 소설이나 문학작품, 민담 류가 더 정이 깊고 가르침이 크고 향기가 짙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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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20여 세 때 최인욱(1920~1972)이 지은 소설 <임꺽정>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에 ‘충청도 황간 땅에는 양반 싸움이 벌어져서 화제가 되었다. 이 양반 싸움은 별로 대단치도 않은 일이 시초가 되었는데, 두 양반집 사이에 원수가 지고 치열한 반목과 쟁투가 있은 끝에 마침내 오도패五道牌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그 소설 3권 6면)
소설에 의하면, 김치백이라는 점필재 김종직 문중과, 이용재라는 훈구파 이극돈의 집안의 사소한 자존심 대결로 다섯 도의 장사를 동원한 싸움이 크게 벌어졌다.
‘이때, 황간 고을에는 당대의 선비로 이름이 높은 남명 조식과 이희안(1504~1559)이 서로 동행이 되어서 남도로 내려가는 길에 잠시 여사旅舍에 들러 유하였다. … 이 두 사람은 … 두 선비의 집에 싸움이 벌어진 것을 알고 개탄하기를 마지않았다. ‘남명, 창밖을 내다보시오. 저기 마당 끝에 나무가 섰는데, 통 맥이 없어 보이는구려. 우리나라의 도학道學이 쇠잔衰殘하기를 마치 저 맥없는 나무를 보는 것 같지 않소?’
이희안이 여사에 앉아서 술잔을 받아놓고 하는 말에, 남명은 쓸쓸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저 맥이 없는 나무는 그래도 봄이 오면 다시 잎을 피울 가망이나 있거니와 우리나라의 도학은 다시 소생할 기틀이 보이지를 않소. 선비니, 양반이니 하는 사람들이 인의仁義를 저버리고 그 마음이 편협 인색해서 서로 패거리를 만들고 시기와 중상과 쟁투로 일을 삼으니, 이것은 장차 이 나라에 붕당朋黨이 발생할 조짐이며, 오국誤國의 장본인가 하오.’
이튿날 여사를 나와서 나귀에 오른 두 학자는 견마를 잡히고 떠나는 길에 황간 고을 현감에게 몇 자 글을 적어 보내서, 이곳 양반의 싸움이 너무 심하니 조절하는 것이 어떠냐고 일렀다.’ 그러나 현감은 그 편지를 무릎 밑에 뭉개고 조처를 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

조구호 박사의 ‘소설 문학에 나타난 남명의 인간상’(<남명학 연구론총> 제4집, 1996)을 보면 홍명희(1888~?, 충북 괴산)의 <임꺽정>, 이재운(1958~, 충남 청양 소설가) <토정비결>, 정동주( 1948~)의 <백정> 등에 나타난 남명 선생을 조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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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명희의 <임꺽정>강직한 은일지사.
‘홍명희 소설 <임꺽정>은 명종조의 명화적明火賊 임꺽정을 중심으로 당시의 시대상을 그리고 있는 장편 역사소설이다. 이 작품은 1928년부터 <조선일보>에 연재된 이후, 몇 차례의 연재 중단을 거듭하다가 1940년 조선일보가 폐간되자 <조광>지로 발표 지면을 옮겼으나 완결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미 발표된 것만도 원고지 1만3.000매 이상되는 방대한 양이며, 미완성 부분은 전체의 10분의 1 정도라 추측되므로, 이를 제외하고도 충분히 그 전체 윤곽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이다.’(전게 조구호 논문)

‘이 글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남명을 비롯한 퇴계 이황(1501~1570), 화담 서경덕(1489~1546), 정암 조광조(1482~1519), 금헌 이장곤(1474~1519), 동고 이준경(1499~1572), 정희량(?~1728) 토정 이지함(1517~1578), 황진이(?~?), 보우(1509~1565) 등 당대 유명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당시 권력을 윤원형(?~1565)이 전횡하고 있어 윤원형의 하인이 주인의 세도를 믿고 악행하여도 관가에서조차 징벌하지 못하는데, 남명이 서빙고 나루터에서 안하무인 격으로 행동하는 윤원형의 하인을 만나 회술레를 시키고 질책을 한다. 이것은 권세를 쥔 윤원형의 세도에 조금도 개의치 않는 남명의 기상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 남명에 대한 평판과 인간상은 다음과 같은 글에서도 잘 드러난다.
조식은 이름이 높은 큰선비라 나라에서 은일隱逸로 불러서 단성 현감을 제수하였더니, 권세 있는 윤원형이 나라를 그르치고 백성을 병들리는 때에 사환仕宦에 종사할 맘이 없어 곧 상소로 사직하고 부임赴任하지 아니하였다.’(3권 173면)

…이러한 남명을 퇴계와 비교해 놓은 것도 흥미롭다.
‘보우가 대왕대비를 끼고 한바탕 뒤설레기를 치는 바람에 불교가 왕성하여 팔도 사찰이 일신하게 되었다. 이때 시골 있는 선비들은 옥하사담屋下私談이 많았는데 이황과 같이 간정한 사람은 당초에 서울 소식을 귀 막고 듣지 않으려고 할 뿐이었지만, 조식은 몸이 시골에 물러와서 있을지언정 맘으로는 세상을 걱정하는 사람이라 제자들을 데리고 앉았다가 말이 나랏일에 미치어 ‘원형 하나도 과하거니 보우까지는 심치 아니하냐. 국가는 장차 어찌 되며 생령生靈은 장차 어찌 되랴’하고 주먹으로 자리를 눌러 팔을 세우며 눈물을 흘릴 때가 있었다.’(3권 193-194면)

<임꺽정>에서 퇴계는 시비를 아는 위인이며, 염퇴恬退(명예나 이익에 뜻이 없어 벼슬을 내어놓고 물러남.)한 선비로 묘사되었다. 퇴계는 윤원형의 전횡으로 옥사가 거듭되어 형 이해(1496~1550)가 역모에 몰려 죽자, 환로에 나설 마음이 없어 고향에 들어앉아 학문에 매진하여 훗날 유림의 종장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로 그려졌다.…
남명은 권문세가의 서슬에도 아랑곳 않는 강직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며 임천에 있으면서도 나라의 일을 걱정하는, 출처가 분명한 선비로 그려졌다.’(조구호의 <전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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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운의 <토정비결>도가적道家的 방외인方外人
‘<토정비결>에서 드러난 남명의 모습을 정리해보면 환로에 나아가 현달을 지향하는 인물도 아니고, 강호에 은둔한 인물도 아니며, 자기를 지키면서 세상을 걱정하는 방외인형의 인물로 그려져 있다. 송도에서 죽은 서경덕이 지기를 모아 혼백을 다시 일으켜 그의 제자 토정 이지함(1517~1578), 박지화(1513~1592)와 함께 전국을 유람하는 동안, 서경덕의 현신을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남명은 알아본다.

‘화담은 천수를 다해서 죽었다네. 그를 지키던 태사성을 보게. 이미 빛을 잃었다네. 그를 지키던 천기天氣가 사라졌으니 그의 죽음은 어쩔 수 없다네. 그러나 그는 도학의 대가, 이 조선 땅에서 손꼽히는 대학자요 선인이라네. 자네도 혼백이 어떻게 모이고 흩어지는지 알 터, 그이는 혼쯤이야 마음대로 드나드는 재주를 가졌다네. 그런 그가 그대로 죽을 수야 없지 않은가? 그래서 그는 지기를 모아 혼백을 다시 일으켰네. 화담은 그의 몸을 이루었던 송도 땅의 기운을 빌어 백魄을 돋구어 혼을 잡아 놓은 거지.’(중권 259~260)
위 인용문은 이지함의 벗인 서기(1523~1591)의 질문에 대한 남명의 대답이다. … 서기는 화담 서경덕(1489~1546)의 장사葬事를 치른 후 <홍연진결>이라는 비결서를 잃어버려 고민에 빠져 있는데, 이 비결서를 산천재 학인들이 가지고 있다는 소문과, 화담이 이지함 등과 산천재를 다녀갔다는 소식을 듣고, 남명을 찾아와서 저간의 사정을 묻자 남명이 설명해 주는 것이다. 여기서 남명이 도가적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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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주의 <백정>실천유학자의 표상
‘<백정>은 임술년(1862) 진주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농민항쟁과 백정들의 신분 해방 운동을 다루고 있다. … 남명은 임술년 진주 농민항쟁을 주도하는 유계춘(?~1862)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고 있고, 그 외 여러 등장인물들이 흠모하는 대상으로 그려진다.

‘9대 주부님 이후부터 쭉 남명 선생의 문하였기 때문에 학문은 그런대로 했습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을 객지에서 보내는 동안 남명 선생의 철학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면서부터 … 사명감을 차츰 확립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2권 35면)
위 인용문은 유계춘이 교리 이명윤에게 선비의 자세를 말하면서, 그 자신이 남명의 제자인 조계 유종지(1546~1589)의 9세 손임과 남명의 철학이 삶의 바탕이 되었음을 밝히는 부분이다.

‘오늘날 학문하는 자들이 아주 가까운 것을 버려두면서,… 문득 성명性命의 오묘함만을 연구 탐색하고자 하면, …이것은 사람의 행사 위에서 하늘의 이치를 찾는 것이니 마침내는 실지로 얻는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셨지 않습니까?’(2권 27면)
‘침잠沈潛한 사람은 모름지기 강기剛氣로써 일을 치러야 할 것이다. 천지 기운은 세기 때문에 어떤 사물을 막론하고 모두 뚫고 나가는 것이다. … 장부의 행동거지는 무겁기 산악 같아서 만 길이나 깎아 선 듯하다가도 때가 오면 움직여야 바야흐로 허다한 사업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라고 했습니다.’(2권 25면)

남명이 초야에 있으면서도 백성의 곤궁함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유계춘은 나라의 녹을 먹는 관리도 아니면서 헐벗고 굶주린 백성을 위하여 잘못된 제도를 혁파革罷하고 탐관오리를 징치懲治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명윤은 이러한 유계춘을 보고 ‘무엇이 자네를 그토록 간절하게 일으켜 세우며 또한 지탱하게 하는가?’하고 묻자, 유계춘은 서슴지 않고 남명의 경의敬義사상이라고 말한다.’
 
이상으로 필자가 본 최인욱의 <임꺽정>과 조구호가 쓴 홍명희의 <임꺽정>, 이재운의 <토정비결>, 정동주의 <백정>을 통해서 본 남명 선생을 발췌해서 싣는다.

조종명 남명진흥재단 이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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