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계의 간절한 우정 나타낸 시 ‘답 남명 처사’
남명 선생 시는 <풍영정 시선>에는 없고, <남명집>과 <칠계유집>에 나타나는데, 위의 시와는 달리, ‘양陽’자운으로 ‘청원정’淸遠亭을 주제로 지은 칠언율시가 있다. 이 ‘양陽자운’의 시는 풍영정 창수 시와는 다르게 퇴계에게 준 칠계 시에 퇴계가 화답한 시, 남명이 차운한 시에 칠계가 화답한 시, 그리고 서산인瑞山人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의 차운시 등 5수를 발견하였다. 앞의 권수용 논문에 의하면, ‘청원정은 김언거의 중형인 김언우의 정자로 1546년 그 아우에게 준 것이다. ‘청원’이라는 뜻은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는 주렴계周濂溪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것으로 청원정에는 연꽃이 심어진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권수용 전게 논문)라고 했다. ‘풍영정’ 시는 77분에게 글을 받았지만 ‘청원정’ 시는 몇 분만 차운시를 받은 것이다.
<남명집>에 실린 시 화개정정취만당華蓋亭亭翠滿塘 꽃봉오리 늘씬하고 푸른 잎 연못에 가득한데, <칠계유집>에 실린 시 잔생신세기임당殘生身世寄林塘 여생의 삶을 임당에 맡겼는데, 아마도 원운은 퇴계에게 보낸 원운과 같은 시였을 것이다. 남명이 차운하여 시를 보내자, ‘해내海內(나라 안)에 지음知音이 별로 없는데, 그 어느 땐가 남명 노인은 칠계 옹과 같이했었지.’라고 했다. 그전에 어느 땐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름을 아는 정도로 편지로만 차운을 부탁했을 수 있겠는가? 칠계 선생 14대손과 남명 선생 14대손의 만남 30여년 전에 9대 <애감록>哀感錄을 보관하고 있던 환재 하유집 옹이 합천의 9대조 연원가淵源家를 방문했는데, 돌아가고 난 뒤에 그 마을의 사람이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지금 14대조의 종유인을 찾는 것이니 ‘정신없는 사람’의 짓이라 하고 말하겠는가?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일이다. <풍영정 시선>을 보면 광주나 인근의 고을살이로 온 분이 몇 대조의 시를 보고, 혹은 지나가던 과객이 벽상에 걸린 시를 보고 차운한 시가 더러 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일 아닌가? 벽상에 걸린 시를 보고 차운한 시도 있어 ‘… 풍영정이 광주지역의 대표적 문화공간으로서 그 명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풍경이 수려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광주, 나주, 장성 등지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많은 사람의 출입이 자유로운 이점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이와 아울러 초축자의 역량이나 후손들의 수호 노력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여 오랜 기간 문화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권수용 전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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