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계의 간절한 우정 나타낸 시 ‘답 남명 처사’

산청시대 2022-05-27 (금) 10:55 1년전 1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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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현판

남명 선생 시는 <풍영정 시선>에는 없고, <남명집>과 <칠계유집>에 나타나는데, 위의 시와는 달리, ‘양陽’자운으로 ‘청원정’淸遠亭을 주제로 지은 칠언율시가 있다. 이 ‘양陽자운’의 시는 풍영정 창수 시와는 다르게 퇴계에게 준 칠계 시에 퇴계가 화답한 시, 남명이 차운한 시에 칠계가 화답한 시, 그리고 서산인瑞山人 설강雪江 유사(柳泗, 1502~1571)의 차운시 등 5수를 발견하였다. 앞의 권수용 논문에 의하면, ‘청원정은 김언거의 중형인 김언우의 정자로 1546년 그 아우에게 준 것이다. ‘청원’이라는 뜻은 ‘향원익청’香遠益淸이라는 주렴계周濂溪 주돈이(1017~1073)의 <애련설>愛蓮說에서 따온 것으로 청원정에는 연꽃이 심어진 연못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권수용 전게 논문)라고 했다. ‘풍영정’ 시는 77분에게 글을 받았지만 ‘청원정’ 시는 몇 분만 차운시를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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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시판

<남명집>에 실린 시
차김칠계청원정운 조남명 식次金漆溪淸遠亭韻 曺南冥 植(김칠계의 청원정 운에 따라 지음)

화개정정취만당華蓋亭亭翠滿塘 꽃봉오리 늘씬하고 푸른 잎 연못에 가득한데,
덕형수여차생향德馨誰與此生香 덕스런 향기 누가 이처럼 피어나게 했는가?
청간묵묵어니재請看????泥在 보게나 아무 말 없이 진흙 속에 있을지라도,
불시규화향일광不?葵花向日光 해바라기 해 따라 빛나는 정도만은 아니라네.
                 우又 또 한 수
지애부거유하풍只愛芙?柳下風 유하혜의 풍도 지닌 연꽃을 사랑 하나니,
원이환지오황중援而還止?潢中 당겨도 연못 속에 그대로 있네.
응혐고죽방위애應嫌孤竹方位隘 고죽군이 편협하여 응당 싫어하겠지,
원파청향도노옹遠播淸香到老翁 맑은 향기 멀리 퍼뜨려 이 늙은이에게까지 이르네.

<칠계유집>에 실린 시
차운답남명처사 김칠계 언거次韻答南冥處士 金漆溪 彦?(남명 처사의 차운에 답함)

잔생신세기임당殘生身世寄林塘 여생의 삶을 임당에 맡겼는데,
몽단동화포연향夢斷東華飽軟香 신선의 꿈 끊고 연한 향기 흠뻑 맡네.
한답계변무개사閒踏溪邊無箇事 할 일 없이 시냇가를 한가히 걷노라면,
홍운경리상천광紅雲鏡裏賞天光 붉은 구름 거울 속에 하늘빛을 즐기네.
일봉서신원수풍一封書信遠隨風 한 장 서신이 멀리 바람을 따라,
홀락유입궤안중忽落幽入机案中 홀연히 내 책상 속에 깊숙이 들어왔네.
해내지음유아소海內知音惟我所 세상에서 내 마음을 알아줄 이 별로 없는데,
당시명로여계옹當時溟老與溪翁 그때 남명 노인은 칠계 옹과 같이했었지.

아마도 원운은 퇴계에게 보낸 원운과 같은 시였을 것이다. 남명이 차운하여 시를 보내자, ‘해내海內(나라 안)에 지음知音이 별로 없는데, 그 어느 땐가 남명 노인은 칠계 옹과 같이했었지.’라고 했다. 그전에 어느 땐가 만난 적이 있었던가, 이름을 아는 정도로 편지로만 차운을 부탁했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옛날 ‘명로’冥老와 ‘계옹’溪翁이 어느 곳에서 만났는지 모르지만, 오늘 풍영정으로 그 후손을 만나러 간 것이다.

칠계 선생 14대손과 남명 선생 14대손의 만남
‘풍영정’에 도착하니 조선배 씨와 광산 김씨光山金氏 칠계공파漆溪公派 회장 김양중金良中씨가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분은 종가에 전해오던 유문과 읍지, 여러 문중의 문집을 탐구하여 질정 번역 작업을 추진한 후손이다. 2004년에 <칠계유집>漆溪遺集, 2007년에 <풍영정시선>風詠亭詩選, 2011년에 <강호만영>江湖漫詠을 번역 출판해서 세상에 펴내었다. 그는 칠계 선생 14대손으로 정축생이고, 나 또한 남명 선생 14대손으로 신사생이니, 선조로부터의 대수는 같고 나이는 내가 4살이 적다. 김선유 남명학연구원 이사장과 같은 종족이라 서로 반갑게 인사하며 ‘연이광김’延李光金이니 ‘광김연이’光金延李(연안 이씨와 광산 김씨가 서로 양반이라는 뜻, 두 집안 모두 정승은 물론 7분의 대제학大提學을 배출한 명문으로 조선 제일 양반이라는 자긍심을 갖고 있다.)니 하고 농담을 나누며 양반 자랑을 하고 한참을 웃었다.

30여년 전에 9대 <애감록>哀感錄을 보관하고 있던 환재 하유집 옹이 합천의 9대조 연원가淵源家를 방문했는데, 돌아가고 난 뒤에 그 마을의 사람이 ‘정신없는 사람’이라고 조롱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 또한 지금 14대조의 종유인을 찾는 것이니 ‘정신없는 사람’의 짓이라 하고 말하겠는가? 아름답다고 하겠는가? 우리 모두 생각해 볼 일이다. <풍영정 시선>을 보면 광주나 인근의 고을살이로 온 분이 몇 대조의 시를 보고, 혹은 지나가던 과객이 벽상에 걸린 시를 보고 차운한 시가 더러 있다. 이 또한 아름다운 일 아닌가?

벽상에 걸린 시를 보고 차운한 시도 있어

‘… 풍영정이 광주지역의 대표적 문화공간으로서 그 명성을 유지해 올 수 있었던 것은 풍경이 수려한 곳에 자리하고 있기도 하지만, 광주, 나주, 장성 등지로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관계로 많은 사람의 출입이 자유로운 이점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이와 아울러 초축자의 역량이나 후손들의 수호 노력도 필수적인 것이었다. 이처럼 여러 가지 요소가 작용하여 오랜 기간 문화의 중심에 자리할 수 있는 것이다.’(권수용 전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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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에서 칠계후손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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