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명, 세상을 일깨우다(28) 광주 풍영정과 월봉서원, 장성 필암서원과 고산서원

산청시대 2022-05-27 (금) 11:13 2개월전 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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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영정

세상을 살아나가는 모습은 상호보완이나 공경, 경쟁, 패배, 승리. 이런 것들이 점철 반복하면서 뜻을 이루어 나간다, 그러면서 어려웠던 일을 해결하고 문화를 창조하고 예술로 승화하며 살아간다. 우리의 조선祖先들은 그렇게 살았다. 그러므로 조선들은 길고 긴 겨울, 혹독한 추위의 끝에 피는, 승리처럼 피어나서 암향暗香을 풍기는 매화에서 지조를, 더러운 뻘밭에서 고아한 꽃을 피워 멀리 청아한 향기를 퍼지게 하는 처염상정處染常淨의 고고함을 지닌 연꽃을 상찬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시로 나타내고, 화운을 해서 주고받았다. 오늘의 여행도 곳곳에서 매화가 피는 모습과 연꽃처럼 아름다운 시가 벽상에 걸린 것을 보는 아름다운 여행을 한다.

고산서원 <노사 문집>, 단성 신안정사에서 간행

이번 여행은 광주 ‘풍영정’風詠亭이 주 목적지로, 가까운 광주 ‘월봉서원’月峯書院(고봉 기대승(1527~1572)을 주벽으로 박상(1474~1530), 박순(1523~1589), 김장생(1548~1631), 김집(1574~1656) 배향)과 전남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하서 김인후(1510~1560)를 주벽, 양자징(1523~1594) 배향. 세계 문화유산 지정), 장성 ‘고산서원’高山書院(노사 기정진(1798~1879) 주벽, 김록휴(1827~1899), 조의곤(1832~1893), 정재규(1843~1911), 기우만(1846~1916), 김석구(1835~1885), 정의림(1845~1910), 이최선(1825~1883) 배향)까지 둘러보았다. 기로사의 ‘고산서원’은 노사 문집을 단성의 ‘신안정사’新安精舍에서 간행했고, 지금도 단성 유림이 자주 출입하는 곳이다. 가는 곳마다 선비들이 좋아하던 매화꽃이 그윽한 향기로 환영해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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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봉서원


3월 21일 광주 칠계漆溪 김언거(1503~1584) 유적지 ‘풍영정’風詠亭(광주광역시 광산구 풍영정길 21)을 찾았다. 광주 문화재자료 제4호로 후손들이 14번을 중수했다고 한다. 영산강 상류 칠계의 아름다운 절벽 위에 12동의 집을 지었었다지만, 임진왜란으로 불타고 지금은 한 채의 정자에 부지 2천여평만 남기고 일대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아름다운 정취는 아는 사람만 알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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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암서원

광주 문화재자료 4호 ‘풍영정’‥후손 14번 중수

‘풍영정’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명종의 명으로 정자 현판의 글씨를 무주 구천동에 사는 갈 처사에게 받으러 찾아갔으나 만나지 못하다가 14번을 찾아간 끝에 칡으로 만든 붓으로 써주는 글씨를 받았다. 가는 도중에 절대로 봉투를 열지 말라는 당부를 하였으나 궁금해서 열어보았더니, 갑자기 돌풍이 불어 ‘풍’자가 날아 가버렸다. 다시 가서 글씨를 받으려 하였으나 끝내 거절해 갈 처사의 제자 황 처사로부터 ‘풍’자를 받아다 현판을 만들어 붙였다. 임란 때 왜군이 불을 질러 11동은 모두 불타고 ‘풍영정’에까지 불이 붙자 갑자기 풍영정 3자가 오리가 되어 날아갔다. 깜짝 놀란 왜장이 불을 끄니 다시 오리가 날아와 지금의 현판이 복원되었다고 한다. 지금 현판을 자세히 보면 ‘풍’자가 다른 두 글자와 글씨체가 조금 다른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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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서원

현판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이 있는 ‘풍영정’

광산에 사는 성헌惺軒 조선배曺瑄培 일가에게 관람을 주선해 달라고 연락해 놓고, <남명집>과 <칠계
유집>漆溪遺集을 미리 읽었다. 칠계는 23세에 진사, 29세에 문과에 급제했다. 1560년에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정삼품 당하관)를 끝으로 퇴직을 하고 고향 광주로 내려왔다. 영산강 상류인 극락강極樂江(혹은 칠천漆川)변 절벽 위에 풍영정을 짓고, 풍영정 10경을 주제로 한 ‘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이라는 원운시原韻詩를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에게 부탁했다. 이에 주인은 전국 명사들의 차운시를 받아 벽상에 걸었다. 이리하여 퇴계 이황(1501~1570), 석천 임억령(1496~1568), 규암 송인수( 1499~1547), 면앙 송순(1493~1582) 등 77인의 시 100여 편을 현액하고 <풍영정시선>風詠亭詩選에 그 시들을 모두 실었다. 모두 ‘우尤자 운’을 압운押韻한 칠언율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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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도의 풍영정

전국 명사 77인의 차운시 100여 편 현액

이처럼 차운시가 많고 또 시판이 많이 걸려 있는 정자가 또 있는지 나는 모른다.
칠계는 1560년에 퇴직하고 향리로 내려왔지만, 구진성 박사가 보여준 권수용(전남대 호남학연구소)의 <광주 풍영정의 문화사적 의의>라는 논문에 의하면 ‘한편 송순의 시 ‘등김첨정언거 풍영정 차송감사인수 호규암 계묘 登金僉正彦? 風詠亭 次宋監司麟壽 號圭庵韻 癸卯’로 적고 있다. (송인수는 남명선생의 친구로 어머니 인천이씨의 묘갈을 짓기도 했다) 그때 윤원형 등의 미움을 받아 1543년(계묘癸卯)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되었다. 이러한 정황으로 볼 때, 김언거는 이미 1543년이나 그 이전에 풍영정을 짓고 있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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