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영인의 문화 기행(22) 금재 강한 선생 추모 제향 봉행‘명옥탄 물줄기 따라 거문고 소리 흐르네’
금재는 조선 성종 때 진주강씨로 휘(諱)가 한(漢)이다. 예종이 즉위한 1468년 부친 강이경은 군위 현감으로 제수된 상태였으나 부임하기도 전에 유자광의 모략에 의한 남이 장군의 역모 고변에 함께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기록에 의하면 남이와 함께 계를 만들고 활쏘기를 하였다고 하여 억울한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후 금재는 어머니 신 씨와 함께 함양으로 유배를 왔다. 청금정 아래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을 명옥탄(鳴玉灘)이라 불렀다. 금재는 청금정에서 후학을 가르치고, 많은 시인 묵객들과 어울리며 여생을 보냈다. 그가 교육에 힘썼다는 점은 아동용 교과서로 사용하기 위해 <동몽수지>(童蒙須知) 판각을 만들었다는 점을 봐서도 알 수가 있다. 당시 그가 무슨 연유로 이곳에 거처를 정하였는지는 전해지고 있지 않으나, 명성은 대단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필봉산을 금재 강한 선생이 사는 곳의 높은 산이라 하여 인근에서는 모두 강고산(姜高山)이라고도 부르며, 당시 경상도 관찰사였던 모재 김안국(1478-1543)이 강한 선생을 만나러 직접 찾아올 정도였다. 모재는 1517년에 부임하여 2년간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했으니 모재가 방문한 것은 이 시기일 것이다. 모재는 여기서 묵으며 시문을 논하고, 선생을 위한 아래의 시를 지었다. 청금정 기둥의 주련에 걸려 있는 시구를 감상하면 세상을 등지고 자적(自適, 아무런 구속도 없이 마음껏 즐김)하며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 頭流山色吟窓裏(두류산색음창리) 두류산 풍경을 창 안에서 읊으니,
금재 중심 산청·함양 선비 학맥 교류 금재는 남사예담촌과 단속사지 정당매와 인연이 있는 통정공 강회백의 종증손이다. 남계서원 창건을 주도한 개암 강익(1523-1567)은 금재의 손자로 남명 조식(1501-1572)의 문인이다. 개암은 덕계 오건(1521-1574), 동강 김우옹(1540-1603)과는 벗으로 지냈으며, 명종 6년(1551) 남명이 화림동을 유람할 때 옥계 노진(1518-1578), 덕계와 함께 참석하였다. 그 후 명종 9년(1554) 32세 때 남명을 찾아가 몇 달 동안 기거하며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인연이라면 남명도 개암의 조부인 금재에 대해 잘 알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거창 원학동에 거주한 동계 정온(1569-1641)은 외증손이 되고, 금재를 찾아왔던 모재는 김굉필의 문인이므로 당시 경상우도의 거유(巨儒)들과 모두 연이 닿는다. 이러한 연유로 근세까지 청금정에서는 음력 4월 9일에 모여 약 1주일 정도 강회를 열었다. 강학의 내용은 시, 서와 사서삼경 등 다양하였으며, 강학을 주도한 인물은 특리마을에 거주한 계초 민치량(1844-1932)으로 그는 노사 기정진에게 수학한 후 고종 7년(1870) 경오식년시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를 지냈다. 또 50여 년 전에는 인근 초등학교 공사 때 교실로도 사용되었을 정도로 이때까지 강학의 공간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여름 무더위에는 동네 개구쟁이들의 물놀이 장소이기도 했던 명옥탄은 시대의 변화에 따라 안타깝게도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지며 황폐화 되고 말았다. 이번 행사에 참석한 산청과 함양의 유림들은 다시 관심을 고조시켜 글 읽는 소리와 거문고 소리 울리는 강학과 풍류의 공간으로 청금정이 부활하기를 모두 희망했다.
민영인 문화부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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